hwain_film 추천 no. 28
제목: 자산어보
감독: 이준익
출연: 설경구, 변요한, 이정은 등
네이버 평점: 9.03
개봉: 2021
(*이 글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영화적 해석에 있습니다.)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앞에서 영원한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나날이 맺히는 새로움에 적응하여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뿐. 난세의 조선 후기 우연히 영근 사제의 정을 담은 영화, 자산어보를 소개한다.
1. 흑백 영화
이 작품은 <왕의 남자>, <황산벌>, <동주> 등 역사영화의 대가 이준익 감독의 작품이다. 감독은 앞서 선보인 <동주>와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에서도 모든 촬영본을 흑백으로 연출했다. 흑백 영화의 매력은 색과 빛을 모두 감추어도 인물과 감정선이 빛난다는 아이러니함 속에 있지 않을까. 이 흑백의 영화는 성리학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변화를 꾀하는 세력 간의 마찰을 상징화하는 동시에 인물 사이의 갈등과, 가치관 속에서 고뇌하는 개인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2. 정 씨 사람들
조선 후기 최고의 명문가 나주 정 씨에는 우리가 익히 들어본 역사적 인물들이 있다. 정약용과 그의 두 형 정약전, 정약종. 어릴 적부터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서양의 학문들을 자연스레 접하게 된 그들은 그중 서학의 천주교를 받아들이면서 생사의 갈림길에 스스로 걸어간다. 그들이 품은 천주 교리는 성리학과 명백한 대립을 이루었고, 조선의 근간적 사상인 성리학을 부정한다는 건 당시로선 생존의 이유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작품은 사회의 사상적 동화 앞에서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을 고수하는 정 씨 인물들을 그린다.
3. 창대와 약전
창대와 약전은 아이러니한 인물들이다. 창대는 나이가 어리지만 보수적인 학문 '유학'을 공부하고, 상놈이지만 글을 배워 벼슬(신분상승)을 꿈꾼다. 반대로 약전은 나이가 많지만 당시 가장 진보적인 학문 '서학'을 공부했고, 양반의 신분임에도 하층민들의 삶을 기록한다. 이 불협화음 속에서 그들은 계급과 사상 뒤에 가려진 인류애를 발견하고, 끝내 조화를 이룬다. 조선시대 양반과 상놈이 조화를 이루는 이 이야기는 특권층과 평민층의 우정을 그린 <그린북>과 <언터쳐블: 1퍼센트의 우정>과 어딘가 닮아있다. 우리가 이 작품들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는 이유는 부조화 속의 조화가 우리 인생을 설명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은 아닐까.
4. 기록
유배지에서 약전은 기록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기록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작품 <자산어보>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후세의 사람들이 수정하고 보완한다면 이 책은 병을 치료하고 쓰임을 이롭게 하며 재물을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이미 기록의 의미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기록은 후대를 이롭게 해 줄 유일한 행위이며, 한 권의 책은 변화무쌍한 시대적 흐름에도 굳건히 살아남을 유일한 물건이다. 오늘날 교과서를 포함한 다양한 창작물들은 당시 멸문할 위기에 놓였던 정 씨 일가에 대해 조선의 망조 직전 변혁을 주장한 몇 안 되는 진보적인 인물들로 평가한다. 부와 명예, 가족까지 일순간에 모두 잃어버리고 한적한 유배지에서 쓸쓸히 잊혀 가던 그 사람은 현대인들이 아직도 그를 기록하고 기억하며 살아갈 것을 예상이나 했을까.
5. 한 줄 평- 역사는 승자만 기억하고, 기록하는 자가 승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