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다음 주를 위한 밀프랩
한 달 전쯤 사고가 있었다. 파리에서 소매치기에게 폭행을 당해서 부상이 있었다. 응급실이며 경찰서며 이곳저곳을 오가고 안정을 취하기 위해 의사의 권유로 며칠간 연구소 출근을 쉬기도 했었다. 생각보다 담담한 기분이라 이런 기분이어도 괜찮은가 싶었지만 불안감을 가지고 세상을 무서워하는 것보다는 지금의 내 상태가 낫겠다 싶기도 했다. 다행히도 부상이 심하지 않아 수술할 필요 없이 뼈가 붙기를 그저 6주가량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의사에게 물었다. "1주일 뒤 비행기 타고 여행 가도 되나요?" 이미 예약된 여행이었고 취소할 수가 없었다. 아니 취소할 수는 있었다. 다만 모두 환불이 안될 뿐이었다. 나는 나를 때린 소매치기범을 잊을 수는 없지만 그런 쓰레기 인생 하나에 내 계획, 내 인생이 영향받는 게 싫었다. 가능하다면 계획된 여름 여행을 가고 싶었다. 그런 사건에 휘둘리지 않고 싶었다. 다행히도 주치의가 괜찮다 말해줬기에 의사의 허락을 받고 5박 6일간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다녀왔다. 여행을 가서는 안 좋았던 사고의 영향인지 조금 과하게 '난 즐거워야 해', '하고 싶은 건 다 해야 해'라는 생각들에 사로잡혀서는 생각 없이 먹고 싶은 건 다 먹고 보고 싶은 것도 다 봤다. 그래서인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문제는 즐거움 후에 찾아왔다. 프랑스의 체크카드는 돈이 사용 즉시 빠져나가지 않고 2~3일 내에 빠져나간다. 그래서 잘 못하면 통장이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 마이너스가 되면 어느 정도 기간 내에 다시 채우면 벌금 같은 수수료는 없다고 알고 있었다. 내 주거래 은행의 경우 통장이 마이너스가 되면 문자메시지로 알림을 춘다. 얼마 마이너스가 됐으니 이 날 오후 8시까지 처리하라고 말이다.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아느냐고? 예상할 수 있듯 통장이 마이너스가 됐다. 사용하던 때는 잔고가 계속 있었기에 확인하지 않고 며칠을 계속 썼다. 그런 후 나중에 모두 빠져나가고 보니 마이너스가 된 것이다. 얼른 한국 통장에 있던 돈을 프랑스 내 계좌로 해외송금을 해서는 돈을 채워 넣었지만 해외 송금이니 며칠이 걸리기에 얼마나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는지 모른다. 다행히 별 문제는 없이 마이너스 통장은 해결되었다. 하지만 통장에서 마이너스를 본 순간은 정신적 타격을 줬다. 이렇게 생각 없이 돈을 써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좌에서 마이너스란 숫자를 태어나서 처음 봤다. 이 나이에 (난 어리지 않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현실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아니해야 한다. 아무래도 이번 달부터 조금 아껴가며 생활해야겠다고 느꼈다. 내가 돈을 어디에 쓰는지 생각해 본다. 여행, 공연 외에는 장을 봐서 요리하는 것뿐이다. 주 재료를 자주, 많이 산다. 나는 같은 요리를 여러 번 먹는 것을 싫어해서 요리를 하고는 남은 걸 냉장고에 넣고는 대부분 많이 버리는 편이다. 냉장고에 들어간 요리는 다시 먹고 싶은 생각이 별로 잘 안 든다. 일주일에 장도 3번은 보는 것 같다. 이건 마트 둘러보는 게 일종의 취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트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안 사고 나오는 건 누구라도 쉽지 않다.
일주일 분의 요리를 미리 해두기로 맘을 먹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며 이번 주는 오늘 하루만 장을 본다는 생각으로 차분히 뭘 만들어두고 먹을지 생각하며 재료들을 담는다. 한번 만들어서 많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파스타 소스일 것이다. 소고기로 라구소스를 만들어 파스타나 잔뜩 먹자 싶다. 양파, 당근, 소고기, 토마토소스를 고른다. 그 후 한식 메뉴도 필요하니 조금은 매콤하게 제육볶을을 하고자 돼지고기를 두 덩이에 3.5유로 하는 한 팩을 골라 본다. 그 후 샐러드 채소 한 봉지와 계란을 사고 마무리한다. 20유로 정도밖에 들지 않았다. 이미 집에 남아있는 재료들도 많으니 이 20유로면 일주일 요리하기에 충분했다. 집에 돌아와 요리를 시작한다. 가장 오래 끓여야 하는 소고기 라구소스를 먼저 만든다. 소고기 다짐육, 다진 양파, 다진 당근을 토마토소스와 함께 1~2시간 뭉근하게 끓여준다. 그동안 돼지고기를 얇게 저며 제육볶음 양념에 재워 준비한다. 사뒀던 면이 많이 있어서 비빔국수를 바로 먹을 수 있게 양념장도 만들어본다. 라고 소스는 계속 끓고 있다. 밥을 새로 해서는 라구소스를 만들 때 조금 빼뒀던 다진 소고기와 파, 당근, 계란 등을 넣어 볶음밥을 만들고 냉동실에 저장해 둔다. 볶음밥 3끼 분, 파스타 최소 5 끼, 제육볶음 2 끼, 비빔국수 맘껏 먹는 게 가능한 양이니 일주일 식량으로는 충분하다. 이렇게 일주일 분을 준비하고 나니 지금까지 요리를 즐기며 맛있게 먹겠다는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낭비한 건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일주일 치를 미리 한다고 해서 좋아하는 요리를 즐길 수 없는 건 아니다. 계획만 잘 세운다면 하고 싶은 요리도 하면서 돈도 아낄 수 있을 듯싶다.
한 주를 주말의 밀프랩으로 잘 먹고 지내니 앞으로도 이런 생활을 이어 이어나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월급이 들어오기까지 2주의 시간이 남아있어서 절약하는 생활을 어차피 계속해야 했다. 이번에는 장을 보기 전 일주일 식단으로 뭘 요리할지 미리 계획을 세웠다. 냉동실과 냉장실을 살펴 있는 재료들을 파악했다. 냉동실에는 사다 두고는 먹지도 않았던 재료들이 많았다. 마른 멸치, 무말랭이, 건 고사리, 건 토란대, 건 취나물 (프랑 스니까 오히려 냉동실은 한국 같다. 이유라면, 파리에 한번 가며 귀한 한식 식재료를 쟁여오게 되기 때문이다.) 냉장고에는 지난주에 사 왔던 가지와 버섯도 남아 있다. 이런 재료들을 바탕으로 일주일 메뉴를 짜본다. 먼저 가지를 이용해 소고기가지 라자냐를 만들기로 한다. 다른 파스타보다도 라자냐가 만들어 보관하기가 수월하다. 그런 후, 냉동실에 많은 재료들을 이용해 밑반찬을 만들어 한식을 먹을 수 있게 준비하기로 한다. 멸치를 이용해 멸치볶음, 무말랭이를 양념하고, 건취나물로 나물을, 그리고 건고사리와 건 토란대로는 육개장을 끓이기로 결정한다. 계란도 남아있기에 마약계란장을 만들기로 한다. 만들 메뉴가 정해지고 나니 크게 장 볼 것도 없었다. 소고기 다짐육, 소고기 국거리, 라자냐면, 모차렐라 치즈면 충분했다. 다시 20유로 정도였다.
제일 먼저 라자냐를 만든다. 소고기다짐육과 잘라둔 가지를 볶고 토마토소스와 토마토 페이스트를 넣는다. 이탈리안 시즈닝 허브를 넣고 소금 간을 하며 한번 끓여내 준다. 보통은 리코타치즈 섞은 것을 토마토소스층과 번갈아가며 쌓아주는데, 리코타치즈가 없어서 베샤멜소스를 만든다. 버터를 녹이고 밀가루 루를 볶아 우유를 넣고 저어 잘 풀어주고 소금, 후추로 간을 해주면 끝이다. 오븐을 예열하고 라자냐 오븐팬에 라자냐를 쌓기 시작한다. 먼저 토마토소스를 바닥에 깛아주고, 라자냐면 (따로 익힐 필요 없음), 토마토소스, 베샤멜- 다시 라자냐면, 토마토소스, 베샤멜을 반복해 주고 마지막 층에서는 베샤멜 없이 토마토소스 위에 모차렐라 치즈를 뿌리고 끝낸다. 그런 후, 알루미늄 포일로 감싸주고 40분가량 오븐에서 익히고 포일 제거하여 15분 윗면까지 잘 구워내 주면 라자냐 완성이다. 라자냐를 만들고 중요한 것은 바로 자르지 않는 것이다. 바로 자르면 모두 흐물흐물하니 주저앉는다. 조금 식힌 후 잘라줘야 층이 잘 유지된다. 6조각으로 나눠 락앤락 통에 담아 식힌 후, 냉동보관한다. 6끼가 완성되었다.
계획대로 이제 반찬과 국을 만들어 일주일 한식 밥상을 준비할 시간이다. 먼저 소고기로 육수를 내어 국을 끓이기로 한다. 원래 육개장만 만들 생각이었지만, 소고기 육수를 만들어 한 번에 몇 가지 국을 끓이시던 엄마가 생각나서 2/3는 원래 계획대로 육개장으로, 1/3은 미역국을 만들기로 계획을 변경한다. 소고기 육수를 충분히 내고는 다른 냄비에 불려둔 미역과를 참기름에 볶아주다가 육수와 약간의 고기를 잘라 넣는다. 다진 마늘을 넣고 국간장으로 간을 하여 간단하게 미역국을 완성한다. 육개장을 위해서는 중요한 재료인 고사리를 미리 불려놔야 했다. 토란대를 넣으려고도 했지만 한 번도 다뤄보지 않았고 독성이 있고 잘못하면 요리 전체를 망칠 것 같아 이번엔 빼기로 한다. 불려둔 고사리를 끓는 물에서 20분가량 푹 삶아내어 부드럽게 준비한다. 삶은 고사리, 육수내고 찢어둔 고기를 섞고 여기에 다진 마늘, 고춧가루, 국간장, 후추, 약간의 육수를 넣고는 조물조물 버무려준다. 그렇게 잠시 양념이 스며들게 놓아도 후, 육수에 고기와 고사리를 넣고 끓여준다. 냉장고에 남아있던 버섯도 잘라서 넣어준다. 파도 넣고는 계란물을 푸어 부어준다. 맛을 본다. 아무래도 고기육수가 충분히 진하지 못했나 보다. 돈을 아끼며 고기를 너무 조금 샀던 건지 미역국까지 끓인다며 양을 늘리려 물을 너무 늘렸던 건지 국물이 진하지 않다. 어쩔 수 없다. 과학의 힘을 빌리자. 조미료를 넣는다. 다시 맛을 본다. 훌륭하게 맛있는 육개장 한 솥이 완성됐다. 거의 열흘은 먹을 것 같아 예상보다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졌다.
이제 국은 끝났으니 반찬가지들을 만들어보자. 냉동실에 보관했던 무말랭이를 꺼내 무침을 만들어 주고, 불려둔 건취나물은 고사리처럼 20분가량 푹 삶아준다. 양념으로 무쳐 건취나물을 완성한다. 냉동실에 사두고 보관만 했던 멸치를 꺼내든다. 잔멸치로 멸치볶음을 한다. 멸치볶음에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불을 끄고 물엿 같은 단 것을 넣어야 딱딱하지 않은 멸치볶음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냉동실에 있던 어묵으로 매콤하게 어묵볶음도 완성한다. 계란을 삶고 하나하나 껍질을 까고 간장소스로 마약계란장까지 만들고 난 후, 여기에 추가로 냉장고에 배추가 남아있어서 배추를 데쳐내어 된장 배추나물까지 완성해 낸다.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파프리카 남은 게 있어서, 유튜브로 파프리카로 뭘 할 수 있을까 검색하니 파프리카 무침이라고 새콤한 고추장 무침이 나온다. 한번 만들어본다. 파프리카의 단맛과 매콤함의 조합이 좋다. 다음에도 종종 해 먹을 것 같다.
냉장고에 반찬가지와 국까지 넣으니 (일부 국은 냉동실에 보관) 가득 차서 풍성한 냉장고가 되었다. 보통의 한국 가정 냉장고와 그 모습이 닮았다. 기분 좋은 모습이다. 한국에 있는 기분이다. 마치 엄마가 반찬이라도 보내줘서 가득 채운 기분이다. 이렇게 이것저것 만들었으니 꼭 다음 주까지 기다려서 먹을 필요가 있겠는가, 바로 맛볼 시간이다. 푸짐하게 한 상을 차려본다. 반찬에 국에 이것저것 많지만 메인으로 고기요리를 두고 싶다. 주말이니까- 재빠르게 냉장고에 있던 고기를 양념해서 구워낸다. 이렇게 구워낸 고기와 오늘 준비한 반찬들, 지난주 담갔던 깍두기까지 곁들이니 여느 백반집 못지않는 맛있는 한식 한 상이 거하게 차려졌다.
냉장고에 반찬이 가득하니 퇴근 후 식사가 너무 쉽다. 원래도 요리를 30분 내에 끝내는 편이긴 했지만 (가끔은 한 시간 내) 이제는 10분 내로 모든 준비가 끝난다. 보관이 용이하지 못한 반찬들을 먼저 먹으면서 하나하나 퀘스트 끝내듯 먹어 해치운다. 어느 날은 야식이 먹고 싶어 먹고 싶은 반찬들을 넣어 비빔밥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밤에 엄마 몰래 야식 먹는 기분이다. 양푼까지 있었으면 그 기분을 더 낼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양푼이 없다. 양푼까지 있었다면 감성조차 100%이었을 텐데 하며 아주 조금 아쉬워했던 순간이었다.
이제는 월급이 들어왔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지만, 이렇게 반찬을 미리 만들던 순간들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기에 앞으로도 돈도 절약하는 차원에서 이런 생활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반찬이 가득 차서 냉장고를 열기만 해도 기분 좋았던 그 느낌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