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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확위 Jun 26. 2024

백신을 내가 사 오라고요?

프랑스의 연구소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초반에 의사에게 가서 기초건강검진을 받으라는 안내를 받았다. 한국에서 취업을 한 경우에 하는 건강검진 같은 것을 기대했던 나의 생각이 허탈하게도 90%가 문진이었다. (그 후에 또 다른 곳에서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라고 했지만, 피를 뽑고, 청진기를 갖다 댄 것 외에 별다른 검사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가벼운 의사와의 만남보다 나를 놀라게 만든 건 바로 백신이었다. 


나에게 소아마비 백신을 언제 맞았냐고 물었다. 그래서 아마 어릴 때 맞은 것 같다고 대답하니, 프랑스에서는 소아마비, 디프테리아, 파상풍 백신을 성인이 된 후에도 매 10년마다 맞는 게 의무라고 했다. 그러면서 처방전을 써줄 테니 백신을 사가지고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영어를 알아들었는데 그 내용이 이상해서 내가 제대로 들은게 맞는지 의문이었다.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았다. 백신을 사 오라고 했다. 머릿속에서 입력 오류가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내가 물었다. 


나: "백신을 사 오라고요?

의사: "네, 제가 처방전을 적어줄 테니 백신을 사 오세요."

나: "그럼 제가. 약국에 가서. 백신을 사서. 집에 가져가서. 보관하다가. 다시 병원 예약을 잡고. 백신을 들고.... 병원에 오라고요?" 


나는 내가 들은 내용을 천천히 다시 반복해 말했다. 내 말을 들은 의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거의 황당한 기분이었다. 백신 같은 것은 냉장보관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이런 게 제대로 보관이 되는 곳에 두고 백신을 주입해야 하지 않나 하는 걱정부터, 안 그래도 병원 예약이 귀찮고 힘든데, 백신을 맞기 위해서 [1. 병원을 예약하고 찾아간다. 2. 처방전을 받고 약국을 가서 백신을 사 온다. 3. 병원을 다시 예약하고 4. 보관해 둔 백신을 가지고 다시 병원을 찾는다. ]이런 귀찮은 과정을 거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COVID 시국이던 당시 물론 코로나 백신의 경우는 예외였다. 약국과 피검사등을 진행하는 laboratory들에서 백신을 바로 놔주고 있었다.)


예전에 내가 어린 시절에는 한국의 의약분업이 지금처럼 제대로 분업화되지 않았었다. 병원에 있는 약국에서 약을 처방받았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러면서 의약분업이 법으로 제정되고 어느 정도는 분업화가 되었는데, 프랑스처럼 철저하진 않은 듯하다. 내가 갔던 한국의 정신건강의학과의 경우 병원 원내 처방 형태로 약을 줬었고, CT를 찍거나 할 때 병원에서 바로 조영제를 놔주고 찍었었다. 백신도 물론 병원 가면 병원에서 보관하던 백신을 놔주고 말이다. 어느 정도는 병원에서 보관 및 관리를 하면서 약물을 내어주고 있었는데, 프랑스는 그게 달랐다. 


모든 약국들의 약물들이 표준화가 되어있어 보유량을 유지하는 건지 병원 근처가 아닌 어느 약국을 가도 정신과약물을 주었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백신을 사서 집에 보관한 뒤 다시 병원에 가져가서 주사를 맞아야 했고, 더욱 신기했던 것은 CT 스캔이 예약되어 있었는데, 내가 약국에서 조영제를 사서 가지고 있다가 CT 찍는 날 센터에 들고 가야 했다. 의약분업이 굉장히 철저하게 (지나치게) 지켜지는 느낌이었다. 더 나아가 한국에서 수술을 한 후에 원내 약국을 통해 충분한 약물을 줬었는데, 프랑스 병원에서 수술 후 밤에 당일 퇴원하는 과정에서 밤에 먹을 약 한 알을 줬다. 아침에 날 밝으면 약국에 가서 약을 사라며 처방전을 줬다. 


한국에서는 처방전으로 약국에서 약을 사면 먹을 약들을 약사가 조제하여 한 봉지에 먹을 만큼 각각 포장되어 있지 않나. 아침/저녁/아침/저녁 이렇게 말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약을 사면 모두 원래의 상자에 담긴 완제품 약을 준다. 그래서 실제 필요한 약보다 더 많은 약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모두 포장된 상태로 판매가 되기 때문에 약사에 의한 임의조제가 불가하다고 들었다. 프랑스 약국에서의 약사는 의사의 처방전 그대로의 약물을 환자에게 공급하며, 각 약물에 대해 복약지도 하는 게 전부였지만, 아무래도 복약지도가 중요하니 약사의 존재가 필요한 거겠지.  


프랑스의 철저한 의약분업을 경험하며, 이렇게 백신 하나 맞는데 귀찮으면 사람들이 잘 안 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고, 어떤 약국을 가도 동일한 약을 주는 점에서 편리함도 느꼈고, 조영제를 내가 챙겨야 함에 불안함도 느꼈고, 항상 너무 많이 받아온 약들에 낭비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에서 이사하며 짐 정리를 하다 보니, 남은 약들이 서랍하나를 꽉 채우고 있더라.) 

+약을 조제할 필요가 없어서 프랑스 약국의 약사들은 한국보다 일하기 편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약국에서 사서 챙겨간 조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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