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는 때려치울래
프랑스에서 돌아온, 2년이 넘는 시간을 지냈으면서 프랑스어를 못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아쉬워졌다. 돌아오기 직전에 사람들과 더 친해지면서 프랑스어를 못해 그들과 더 통하지 못했던 경험이 큰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취미생활로 할 것으로 프랑스어를 선택했다. 프랑스어 교재를 주문하고, 프랑스어 스터디에 들어가고, 주말에 있는 프랑스어 회화하는 곳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도 그랬듯, 프랑스어는 내 우선순위가 아니다. 사실 내게 딱히 필요한 언어가 아니다. 굳이 필요한 게 아니니, 일상 속 나의 to do list에서 항상 우선순위가 밀려났다. 다른 일들을 모두 한 후에 하는 것이 프랑스어였다. 할 것들이 많다 보니, 프랑스어를 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해야 한다고 리스트에 적어뒀는데 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지다 보니, 괜히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네 달 가까이 지났는데, 내 프랑스어 수준은 제자리였다. 그래서 프랑스어를 때려치우기로 했다. 프랑스어를 하면서 동시에 부족한 영어를 위해 영어공부도 병행하려다 보니 이도저도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규과정으로 영어를 중학교 때 처음 접했다. 지금은 태어나자마자 영어공부를 시작하는 시대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는 달랐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 사교육으로 영어를 접하기는 했다. 본격적인 영어공부를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영어를 접했다"정도로 하겠다. 어린 시절 TV가 고장 난 이후 부모님은 새로 사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 TV가 없었다. 부모님은 TV를 보는 대신 책을 읽으라는 의도였는데, 난 딱히 책을 읽는 아이는 아니었다. TV대신 엄마는 비디오를 자주 빌려다 주셨다. 대여점에서 빌려온 각종 할리우드 영화들을 보며 자랐다. 그래서 지금도 90년대와 2000년대 초의 할리우드 영화는 제법 빠삭하게 알고 있다. 엄마가 좋아하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팝음악을 들으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중학교에서 본격적인 영어 수업을 학교에서 들었다. 딱히 영어 과외를 하진 않았지만 영어 성적은 항상 좋았다. 고등학교는 외고를 가면서 영어 수업이 많았다. 그때부터 미드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봐서인지 영어 듣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학교에서 영어 수업이 많아 수능 영어에도 어려움을 느끼진 않았다.
학교에 원어민 회화 수업이 있기도 했지만 내성적인 나는 원어민과의 회화가 항상 불편했고 영어로 말하기를 꺼렸다. 언니와 오빠가 나보다 영어 회화를 자신감 있게 잘해서 그들 옆에서 항상 위축되며 더 영어로 말하지 않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 우울, 불안 증세가 심해지며 등교거부를 하기도 했고, 잠시 학교를 쉬기도 했다. 그러니 수능을 잘 봤을 리가 없다. 아무 곳에나 학교를 갔고, 그 후 편입을 하기로 했다. 편입 영어를 시작하는데 외워야 할 단어가 수두룩했다. 초반에는 조금 열심히 준비하다가 그것조차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편입시험을 어쩌다 보니 괜찮게 보았고, 그렇게 새로운 대학교에 들어갔다. 토익을 보았다. 900점은 나왔다. 텝스를 보았다. 그 당시 점수로 800점 정도가 나왔던 것 같다. 주변 친구들이 높은 점수라고 했다. 나는 그 당시에도 영어 회화는 못해서, 스스로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했기에 남들이 제법 높다고 말하는 영어 점수들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준비하려던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 영어점수가 필요했고, 처음으로 시험을 위한 공부로 텝스를 준비했다. 단어 암기는 재밌었다. 어렵지 않았다. 토익 930점과 텝스 850점으로 더 이상의 시험은 보지 않았다. 엄청 높다고 할만한 점수는 아니었지만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러저러한 방황을 하다가 대학원에 진학했고 실험실 생활이 시작되었다. 학부 생활 동안도 영어로 된 교재를 보며 공부하는 데는 익숙했지만 대학원에서는 모든 게 영어였다. 연구를 위해 찾아봐야 하는 자료는 모두 영어로 된 논문이었다. 그렇게 영어를 매일 읽어야 했다. 그럼에도 영어로 누군가와 말할 일은 없었다. 대학원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할 일이 생겼다. 선배들 모두가 안 하겠다고 하여 내가 당첨되었다. 첫 영어 발표였다. 대본을 미리 써서 연습하며 암기하여 해낼 수 있었다. 첫 논문을 쓰며, 영어 작품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영어로 무언가를 쓸 일이 그다지 없었다. 대학원 과정 동안 영어 작문 실력이 크게 늘었다고 느꼈던 때는, 논문이 계속해서 리젝(reject)당하면서, 계속해서 수정하며 새로 써 내려갔던 경험이었다. 한두 달 그렇게 계속해서 수정하고 새로 쓰고를 반복하면서 어느덧 영어 작문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잘 쓴다는 건 아니다. 그저 두려움이 없이 조금 편해졌다고 하겠다.)
졸업 준비를 하면서 해외로 박사 후연구원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영어 회화를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전화영어였다. 짧게 20분 정도 영어로 말하는 것을 몇 달 꾸준히 했지만, 크게 나아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화상영어도 해보았다. 매번 화상연결이 되기 직전 튜터를 기다릴 때마다 긴장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영어 말하기를 연습했다. 일주일에 한 번 할 때는 크게 는다는 느낌이 없었지만, 조금 더 자주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진행하니 영어 말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그렇게 조금씩 영어를 내뱉는 연습을 하였다. 스스로 영어 말하기에 자신감은 없었지만, 해외 박사 후연구원을 위한 여러 인터뷰들을 할 때 영어 소통의 문제점은 없었다. 별 무리 없이 인터뷰를 마쳤고, 그렇게 프랑스에 가게 되었다.
프랑스에 가니, 내 영어의 문제점은 내가 미국식 억양에만 익숙하다는 거였다. 그곳에는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고, 모두 각 나라의 언어의 영향으로 다양한 억양이 있었다. 그전까지 영어 듣기에 어려움을 느껴본 적은 딱히 없었는데, 프랑스에서는 영어로 대화하며 듣기에 매 순간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다. 또한 지금껏 나는 주로 아카데믹한 영어, 전공을 위한 영어를 위주로 사용했다 보니 사람들과 어울릴 때의 일상적인 영어 표현이 매우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스몰토크가 내게 가장 어려웠다.) 생각해 보면 나의 영어회화는 전화영어나 화상영어에서 튜터가 하는 질문들에 대답하거나, 인터뷰에서도 인터뷰 질문에 답하는 등, 누군가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에 익숙했지 서로 질문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일상적인 소통의 경험이 없었다. 이런 경험을 하며 영어를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와서도 영어 자료들을 깨작깨작 건드리기만 하면서 본격적으로 제대로 공부를 하지는 못했다. 한동안 다시 우울과 불안증세로 무언가를 새로 시도할 에너지가 생기지 않기도 했었기에 프랑스에서 돌아온 지 시간이 벌써 7달째이지만 나는 발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