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직에서 일하다 보면 연구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노력한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종종, 연구는 운빨!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노력한다고 보장되는 결과가 아니다 보니, 계속된 실패는 꽤나 큰 좌절감을 안겨준다. 나의 프랑스에서의 연구 생활이 그랬다. 프랑스에서 2년 반 가까이 보내면서, 내가 맡은 프로젝트의 진행이 더뎠다. 스스로에게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앞으로도 연구원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때려치워야 하나?'
'난 능력이 없는 거 같은데...'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리를 사로잡았고, 프랑스에서 일 외에 모든 생활에서 누군가는 황금기라 말하기도 했지만, 나는 내 삶에 불만이었다. 그만큼 연구가, 내 일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컸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내가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나의 아이디어였다. 첫날 지금의 보스가 내게 말했다.
"기존에 하시던 것들을 바탕으로 저희 연구실에 새로운 것을 가져다주길 기대합니다."
워낙 유명하신 분이고 연구실에서 진행 중이던 것들이 많다고 알고 있어서 그중 하나를 맡아서 할 줄 알았는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아이디어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니 좋았다. 며칠을 고민하며 아이디어들을 생각해 내어 제안드렸고 모두 "좋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제안하는 것들에서 "좋네요"를 들을 때마다, 내 안의 연구자로 자신의 자격에 대한 의구심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아이디어는 아이디어일 뿐, 합성이 쉽게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을 고생하다가 어느 날 잘못 주문한 시약이 있었다. 반품도 되지 않아, 이걸 어디에 쓸까 고민하던 중 새로운 연구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얼마 전 후배의 박사 졸업 디펜스를 보면서 '저거 어떻게 못 쓰나?'라고 생각했던 게 있었고, 그때의 생각과 예전에 합성했던 분자와의 결합으로 새로운 분자를 디자인했다.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분자를 모두 합성하고는 진행한 테스트는 성공적이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 그때부터 즐거움이 시작되었다.
거의 3주를 연구가 재밌어 일찍 출근했다. 어떤 날은 새벽같이 눈을 떠, 해가 뜨기도 전에 연구실로 향했다. 친구들은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일해?"라고 말했지만, 돈을 위한 게 아니었다. 즐거움을 위해서다. 난 내 삶이 즐겁기를 바란다. 그게 취미든 일이든, 즐거움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싶다. 그러니 연구가 즐거우면 연구실로 가는 거다. 나는 단순하다.
하나의 분자에서 여러 연구 아이디어가 계속해서 떠올랐고, 내가 제안하는 것마다 나의 보스는 "좋은 생각이네요"라고 말했다. 계속해서 좋다는 게, 내가 잘한 생각인 건지 원래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인가 하는 의문도 생겼다. 내 모든 아이디어가 다 좋을 리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몇 주째 나의 보스는 내가 보내는 아이디어, 결과에 모두 "좋은 결과네요.", "기대되네요.",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등 매우 긍정의 말들만 해주었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 나는 꽤나 괜찮은 연구자인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나름 중요한 실험이 계획되어 있었다. 한 분자지만, 다른 물질을 도입시켜 또 다른 프로젝트로 진행하려는 게 있었는데, 인체 조건에서 내 뜻대로 결과가 나와줘야 했다. 조건을 맞춰 샘플을 준비했다. 예전 연구실의 후배에게 측정을 부탁해야 했기에 샘플을 들고 찾아갔다. 다른 후배가 내가 할 줄 아는 기기에 대해 배우고 싶다 하여 몇 시간을 함께 측정하여 교육시켜 준 후, 내 샘플 측정을 하러 갔다. 난 비싼 기기들을 보면 가슴이 떨려서 쓰고 싶지 않다. 그래서 해당기기도 교육만 받고는 시험을 보지 않아 유저 자격을 얻지 못했던 터였다. 능숙하게 다루는 후배를 보고 '역시 제대로 배워뒀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들기도 했다. 후배가 측정을 하면 나오는 결과에 대해 얘기하며 실험 데이터들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의도한 대로 되었다. 내가 생각한 것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또 하나의 프로젝트가 잘 진행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기측정으로 평소보다 늦게 밤 9시쯤 퇴근해야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의미 없는 하루가 아니었다. 오늘 하루의 결과가 중요했고, 원하는 결과가 나왔다. 실험 데이터가 나온 후, 보스에게 결과 보고를 메시지로 전달하니 "좋은 결과네요. 내일 미팅에서 발표하시죠."라는 말에 집에 돌아온 후, 바로 발표자료를 준비했다. 지금까지의 데이터들과 추가적으로 진행할 것들에 대해 내용을 정리하니 제법 괜찮은 연구들이 모여있는 것 같았다. 즐겁다. 재밌다.
내가 맞았을 때, 이때의 희열은 중독성이 있다. 예전에 느꼈던 기쁨으로 지금까지 연구를 계속했다. 한동안 찾아오지 않던 이 기쁨이 내게 다시 찾아와서 연구의 신이 있다면 감사인사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