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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의 침묵은 어떤 말도 건너지 못하는 다리다

by 이확위
In English, we say: "We don't talk anymore."
But in poetry, we say: "The silence between us is a bridge no word dares to cross."

영어로 우리는 이렇게 말해요.: "우린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아."

하지만 시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우리 사이의 침묵은 어떤 말도 감히 건너지 못하는 다리이다."


(@Threads 누군가의 포스트 중에서)



아침에 눈을 뜨고는 뭉그적거리며 침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SNS에 우연히 본 누군가가 올린 포스트였다. 이 말이 잠이 덜 깬 나를 정신 들게 했던 것은 저 말의 무언가가 내 마음에 닿았기 때문일 거다.


아마 최근에 전해 들어 뒤늦게 알게 된 상실에서, 그간의 부재의 무지 속에 전달되지 못했던 축하 메시지들 때문이었을 게다. 함께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화들이 전해지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나의 무지가 원망스러웠던 바로 며칠 전의 그 기억말이다. 나를 자책하고 떠나간 이에 미안해하던 그 때의 감정에 이 말이 오늘 나의 아침을 사로잡았던 게일 거다. 단순히, 우린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아.라는 건- 말 그대로 그저 단절된 소통을 뜻할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이의 침묵은 어떤 말도 건너지 못하는 다리라는 표현을 보고는 친구에게 전달되지 못했던 카카오톡 메시지들이 생각났다.


카카오톡이라는 다리가 있었다. 평소에 자주 보지 못해도, 단체대화방이라는 그 온라인 공간상에 이름이 담겨있으면- 우리는 우리가 함께라 생각했다. 현실에서라면, 그곳에 없다는 것을 알았겠지만- 온라인 속에서 사람들이 익명이라는 가면 속에 자신을 숨기듯, 떠나간 사람도 있는 듯한 모양새로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우리 사이의 다리였던 메신저를 통해 메시지들이 다리를 건너가려 했지만, 남아있는 우리의 반대편에 그가 없었기에- 우리의 말은 끝내 다리를 건너지 못했다. 그렇게 건너가지 못한 메시지들은 우리에게 읽지 않은 "1"을 남겼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1. 아직 그를 찾아가 인사를 나누지 못한 나에게, 앞으로 절대 사라지지 않을 "1" 이 더 이상 그가 이 세상에 없음을 계속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내가 경험한 가장 슬픈 1이 거기 있었다.


어제 한 친구와 우리의 상실에 대해 나누며 말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런 아픔이 분명 계속 있을 텐데,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남겨진 1을 봐야 하는 거냐고. 나는 그게 너무 서글프고 무서워서, 차라리 모두에게 1을 남기는 사람인 것이 낫겠다고 말했다. 누군가가 떠나야 한다면 내가 차라리 떠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이다.


삶과 죽음이란 언제나 함께할 수밖에 없다. 태어나며 이 세상에 왔으니, 죽음으로 이곳을 떠나는 건 우리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우울과 불안으로 죽음을 생각하던 시절에는 나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사진도 찍기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남기는 게 없을수록, 확실히 잊히겠다 싶었다. 기억되고 싶은 나의 존재가 없다고 느꼈었으니까. 하지만 나 자신이 바뀌며 나는 이렇게 브런치와 같은 공간에도 계속해서 나를 남기고 있다. 나의 일상을, 나의 생각을 세상에 남기고 있었다.


떠나간 친구의 얼굴이 문득 흐릿해진 듯한 기분에 사진을 찾아봤지만, 휴대폰을 바꾸며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다. 온라인에서 친구의 이름도 검색해 보았다. 이런저런 검색어의 조합으로 친구를 찾아보았지만 친구의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친구의 아내의 이름으로 "남편상"에 대한 부고 기사들 외에는 친구에 대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우리가 함께했던 대학교 이름을 넣어 검색하자, 과외를 구하는 친구의 이력과 그의 사진이 떴다. 다시 친구의 얼굴이 선명한 기억으로 돌아왔다. 그 페이지를 캡처해서 저장했다.


아직 젊은 날의 20대에 보았던 애니메이션 "코코"가 있었다. 그 속에서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못해 영혼이 소멸될 위기의 남자가 등장했다. 분명 그의 가족들은 그의 사진도 그와 관련된 많은 것들을 지니고 그를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 나에게는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이 그저 나의 기억 속 추억 몇 조각들과, 지워지지 않은 카카오톡에 남은 읽지 않은 "1"이라는 표시와, 인터넷에서 캡처한 사진한 장뿐이었다.



우리 사이에 놓여있던 다리에서, 그가 떠났다. 언제나 매번 내게 먼저 인사해 주던 그가 떠났고, 뒤늦게 내가 먼저 인사를 할지라도 나의 말은 우리 사이의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허공을 떠다닐 뿐이다. 떠난 이를 통해 남아있는 이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게 이기적인 걸까? 그의 죽음으로 '언제 우리가 이별할지 모르니 남아있는 사람들을 더 챙겨야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미안했다. 나는 그와 그렇게 아주 가깝지도 않았음에도 나의 마음이 이런데- 그와 더 가까웠던 더 많은 기억으로 함께한 삶들이 너무도 많았던 사람들의 상실감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언제나 죽음이 있었고, 언제나 남겨진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그 아픔에 그저 이성적으로 "슬프겠다"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우린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아."보다 "우리 사이의 침묵은 어떤 말도 감히 건너지 못하는 다리이다."라는 말이 와닿았던 건 바로 그런 것을 경험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저 일반적인 표현에는 담기지 않은 가능성이 시적인 표현에는 있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리가 남아있지 않는가. 그러니 완전한 사이의 단절이 아닌 셈이니까. 그런데, 우리의, 떠나간 친구와의 대화가 마치 이 표현과 같다 싶었지만, 이 글을 쓰고 나니 나는 깨달았다. 이제 우리 사이의 표현할 말이 달라진 거다. 우리 사이엔, 이제 다리가 사라졌구나. 시적인 표현이 가진 가능성은 이제 없다. 그 차가움이 무섭도록 안타깝다.


"이제 우린 더 이상 대화하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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