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의 시작, 가을맞이 바뀐 메뉴들
예전에는 생일을 딱히 챙기지 않았다. 생일을 크게 생각하지 않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서인지, 매년 오는 생일이 뭐 특별하냐고 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1년을 잘 버텨온 내 삶을 축하해 줘도 되지 않나라는 생각과 함께, 남들의 축하와 별개로 스스로 나를 축하해 주기 시작했다. 그 후로, 생일에는 나에게 선물을 해주는 편이다. 생일을 위해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위해 먼 곳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었고, 생일을 맞아 좋아하는 맥주를 마시려고 독일 뮌헨의 옥토버페스트에 가기도 했다.
올해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달 전쯤, 이번 생일은 내게 뭘 해줄까 생각을 했다. 휴대폰을 바꿔야 하고, 노트북도 새로 살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어차피 바꿔야 할 것이니 생일 축하를 위한 특별함이 없었다. 그러다 한 두 달 전에 처음으로 방콕에서 갔던 미슐랭 가이드에 실린 파인다이닝에서의 기분 좋았던 저녁이 생각났다. 그런 충분한 기분을 가지게 해 줄 미식의 경험을 내 생일에, 나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한국에서의 파인다이닝들을 찾으니 가격대가 제법 차이가 있었다. 파인다이닝이라 할 만한 곳들은 런치가 십만 원 중후반, 디너는 20만 원 중반 정도 같았다. 물론 더 비싼 곳도 있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생일맞이 누군가와 함께 가려했었다. 하지만 마땅히 갈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딱히 슬프거나 하지 않았다. 둘이라면 아마 런치를 갔을 거 같은데, 혼자 간다 생각하니 디너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혼자만 15만 원이 둘이면 30만 원, 셋이면 45만 원 아닌가. 둘이서 30만 원 런치를 하려다가 혼자가 되니 25만 원 디너를 선택할 수 있는 거다. 오히려 더 저렴하게 말이다. 그러니 슬플 이유는 없었다. 나는 더 맛있는 걸 먹을 테니까.
생일이니까, 보다 더 틀별하게 지금껏 가보지 못한 미슐랭스타의 세계를 경험하고 싶었다. 방콕의 디너도 맛있었고, 모두 친절하고 좋았는데 미슐랭가이드에 소개된 정도였다. 그렇다면 스타의 세계는 무엇이 다를까 하여, 내가 갈 수 있는 예산으로 미슐랭 1 스타의 식당들을 검색해 보았다. 캐치테이블에서 일찌감치 저장해 두었던 곳들 중에 이상하리만치 요즘 들어 예약이 꽉 차 있는 걸로 보이는 곳이 눈에 띄었다. 내가 처음 저장할 때만 해도 예약할 수 있는 날들을 많이 봤던 거 같은데, 오랜만에 확인해 보니 거의 모든 날이 예약 마감상태였다. 찾아보니 최근 요리예능프로에 출연 중인 셰프의 식당이었다. 해당 프로그램에서도 그분의 활약이 인상 깊었기에 궁금함이 더 커졌다. 캐치테이블에 올라와있는 코스의 구성과 사진들을 보았다. 사진을 보면 요리가 담긴 플레이팅이 보이는데, 플레이팅 스타일이 맘에 들 때 음식맛도 더 내 취향일 때가 많았다. 결국 모든 것은 감각의 영역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예약을 하려니 실제 생일당일은 예약이 마감되었지만 바로 다음날 이 있었고, 그전 주에도 가능한 날이 있었다. 생일을 미리 축하하느냐, 다음날 축하하느냐를 고민하다가 공지를 확인하니 생일 다음날부터 가을메뉴로 바뀐다고 했다. 가을메뉴가 무엇일지는 알 수 없었으니 메뉴를 비교할 수도 없었다. 고민 끝에, 가을에 태어난 내 생일을 축하를 위한 것이니 그곳의 가을을 맛보고 싶었다.
예약 당일이 되니 눈을 뜨면서부터, '아 오늘 저녁 얼마나 맛있을까?'란 기대감을 안았다. 그러나 출근을 하고 일을 하면서 일이 그다지 잘 풀리지 않아, 지친 마음에 비까지 내리기에 레스토랑에 가는 길에 몸도 마음도 그다지 가볍지 않았다. 레스토랑은 서울 내 한 호텔의 26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호텔에 들어선 순간, 호텔의 인테리어가 사진 속 레스토랑의 그것과 닮아있다고 느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닫히며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불어가 들렸다. 26층에 문이 열리며,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Vous êtes au vingt-sixième étage.
(당신은 26층에 있습니다.)
한국 서울의 엘리베이터에서 프랑스어 안내방송을 듣다니, 신기했다. 왜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26층에 도달하여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입구에서 안내를 받아 창가의 원형 테이블에 1인 세팅이 되어 있는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잠시 후, 빨간 봉투 같은 곳에 담긴 메뉴를 가져다주었다. 가을 신메뉴라는 소개로 메뉴 중 내가 선택해야 할 한 가지는 가을맞이 호박으로 만든 요리와 캐비어를 계란과 캐비어로 바꿀 수 있다는 거였다. 9만 6천 원을 추가하면 말이다. 그게 더 맛있을 것도 같았지만, 나는 가을에는 호박디저트를 챙겨 먹는 사람이기에, 가을메뉴라면 호박이 더 좋다 느껴졌다. 메뉴가 적힌 종이에는 내 이름과 함께 생일축하도 적혀있어 기분이 좋았다. 내 테이블에 다가와 무언가를 해주는 모든 분들이 "생일 축하드립니다."를 말했다. 모두 차분하니 들뜨지 않는 친절함이 좋았다.
이제 행복했던 요리로 돌아가보자.
아뮤즈부쉬 (Amuse-bouche - 식전 한입 요리)로 나온 "쁘띠 라망시크레(petit l’amant secret) "
쁘띠는 불어로 "작은"이다. 메뉴판 같은 빨간 책자를 가지고 와서 펼치니 그 안에 이 식당의 주방의 모습이 담긴 팝업 북 같은 게 펼쳐졌다. 그것을 배경으로 깔 고, 세 개의 작은 요리들이 나왔다. 식당 안쪽에서 바삐 요리하고 있는 주방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흔히 사람들이 파인다이닝은 "경험"하는 곳이라 설명하곤 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다만 캐치테이블 후기에서 봤던 지난 시즌의 사진에서도 이렇게 장식되었던 것 같아, 처음이 아니라면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오지 않을 듯했다. 무엇이든 처음이 새로운 법이니까.
- 먼저 먹물타르트쉘 안을 배로 채웠다고 했고, 한치와 캐비어라 말했다. 말하는 것을 바로 적을 수는 없어서 서버분이 설명을 해주시면 까먹을까 봐 바로 메모장에 남겼지만, 익숙지 않은 용어들이 머리를 휘저어 제대로 기록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니 이 글의 모든 메뉴의 설명이 완전하지는 못할 거다. 하지만 그 맛은, 나의 진실된 기록이니 신뢰해도 좋다.
- 두 번째는, 꽁떼치즈를 이용해 타르트쉘처럼 바삭하게 만들고 치즈무스와 그 위에 하몽과 뭔가를 얹었다. 꽁떼를 좋아해서 종종 꽁떼를 사 먹는 나니까- 당연 맛있겠지 싶었다.
-세 번째는 제누아즈에 마롱, 그리고 닭간 빠떼라고 한 것 같다.
먼저 타르트쉘에 담긴 한치이다. 바삭한 타르트가 입안에서 부서지면서 얇게 채 썰어진 한치의 부드러움과 그 살짝의 탄수화물 같은 쫀득하면서 탄력 있는 식감과 함께 무언가 산뜻함이 입안을 채웠다. 시작으로 좋았다. 그다음의 꽁떼치즈 쉘은 꽁떼를 구워내니 고소함이 배가되어 꼬소함이 되었다. 어디선가 맛본 익숙한 맛인데 꽁떼가 아니라, 어딘가에서 먹던 과자의 맛이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맛은 있지만- 익숙한 맛이었다. 하지만 가볍게 시작해 고소함과 풍미를 주고, 그 이후에 마롱과 닭간 빠떼가 조금은 더 묵직함을 주더라. 아주 작게 마롱크림이 예쁘장하게 초미니 케이크의 장식처럼 올려져 있었다. 가을은 역시 마롱, 밤 아니겠는가. 입안에서 무스처럼 닭간빠떼가 부드럽게 뭉개지는데, 닭간 빠떼특유의 부드럽지만 가볍지 않은 질감에 닭간의 향이 입을 지배하려 할 때쯤 마롱이 살짝 얹어줘서 그 너무 묵직함을 잡아주는 듯했다.
시작은 산뜻, 두 번째는 고소하며 살짝 기름이 가해지고, 마지막은 묵직하고 진하게.
Entrée (전채 요리)로 처음 나온 건 "송이, 송이, 송이(pine mushroom, three ways)"였다.
이름처럼 송이버섯을 여러 가지 방법을 조리해 냈다고 했다. 송이 벨루떼에 슬라이스 한 송이와 타임으로 폼(foam), 거품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옆에는 빵 같은 건데 이름이 있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안에 송이를 이용한 사바용이라 했다.
음식을 맛보며 모르는 것들을 찾아보았다. 벨루떼(Velouté)는 프랑스 전통 요리의 5대 마더소스 중 하나였다. 에스파뇰, 베샤멜, 올랑데즈, 토마토소스, 벨루떼라고 했다. 에스파뇰과 벨루떼는 처음 들어서, 아직 내 경험치가 한참 부족함을 느꼈다. 벨루떼는 말 그대로 벨벳 같은, 그만큼 질감이 부드럽고 크리미 한 소스라고 한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확인하고 스푼으로 음식을 저었다. 그러자 바로 송이 향이 확 퍼지며 내 코를 기분 좋게 자극했다. 섬세하고 고급진 송이 향이 이 요리의 시작인 셈이다. 이 수프의 풍미와 부드러움 속에 송이 향이 가득 담겨있었다. 안에는 송이를 잘게 잘라서 (2 mm x 2 mm 정도의 큐브처럼 일정한 크기로, 역시 파인다이닝인가-하는 느낌) 부드럽게 함께 익혀져 있어서, 익은 버섯에서 주는 탱글한 식감을 주고, 위에 얹어진 슬라이스 된 생 송이는 또 다른 식감으로 요리를 완성했다.
옆에 빵 같은 것은 패스츄리라 해야 할까. 분명 버터가 엄청 들어가서 구워졌는데 겹겹이 의 느낌이 하니라 하나의 두꺼운 버터 듬뿍 패스츄리를 동그랗게 말아 구워낸 느낌이랄까. 그 안에 송이향이 나는 사바용 소스였다. 수프로 먼저 송이의 향을 가득 느낀 후, 넘어갔었는데- 분명 맛은 있지만, 버터 가득한 두툼한 패스츄리의 식감이 섬세한 송이의 크림을 감싸며 함께 맛을 내는데 최선인지는 모르겠다.
두 번째, 앙트레는 "감홍과 가리미 미-쿠이(Gamhong apple and scallop mi-cuit)"였다. 메뉴를 보았을 때 알아들을 수 있는 게 가리비뿐이었다. 메뉴가 오기 전 검색을 했다.
[[ mi-cuit ]] 프랑스어로 mi = 반쯤, cuit = 익은. 즉, “반쯤 익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겉은 익었지만 속은 덜 익힌 상태로 보통 고기나 생선, 혹은 디저트에 많이 쓰인다고 했다. 연어 미퀴라면 연어 겉만 살짝 구워 속은 레어로 둔 상태이고, 퐁당 오 쇼콜라 미퀴-라고 겉은 구워졌으나 안에는 초콜릿이 녹아 흘러나오는 그런 디저트말이다.
- 감홍은 사과의 비싼 품종인 모양이었다. 감홍사과를 올리브오일에 천천히 조리해 내고 감홍사과에 미쿠이식으로 조리한 가리비를 채웠다고 했다. 아주 작은 꽃들이 콕콕 박힌 게 산뜻하니 예뻤다. 푸릇푸릇한 색이라 가을의 색감이라고 느껴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가운데는 허브와 사과 크림을 부드럽게 굳힌 바바루아(Bavarois)라고 했다. 서버 분이 돌아가신 후, 또다시 검색을 했다. 우유·생크림·설탕에 젤라틴을 섞어 굳힌 차갑고 부드러운 푸딩 같은 디저트였다. 배우는 게 많은 유익한 시간들이었다. 나는 아직 한참 갈길이 멀다.
-세 번째는 사과 크리스털이라 말했다.
자리에서 가리비사과에 사과와 셀러리 주(jus)를 뿌려주었는데, 이 소스가 뿌려지며 사과위 예쁜 꽃 일부가 함께 흘려 내려 접시 위에 안착했다. 쥐(jus)라 함음, 고기, 가금류, 생선등 조리 시 나오는 자연스러운 육즙. 팬에 남은 구운 자국에 육수나 와인으로 디글래즈해서 농축해 만든 맑고 진한 소스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가리비를 굽고, 거기에 사과와 셀러리즙 같은 걸로 디글래이즈를 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사과를 갈라보았다. 사과는 약 1mm 정도로 아주 얇았다. 안에 가리비가 큐브로 잘라진 게 보였다. 한 입 가져가는 순간, '우와'라는 감탄사가 머릿속에 떠올렸다. 셀러리의 향이 너무 좋았다. 가리비는 너무도 부드럽고, 얇은 사과가 아주 살짝 사각 하지만 단단하지 않은 그 얇은 사각함에 부드럽지만 탄력 있는 가리비와 함께 산뜻한 셀러리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셀러리와 사과를 섞어서인지 셀러리만의 향이 과하지 않고 밸런스가 잡힌 느낌이었다. 두 번째 크림은 부드러운 크림이었지만 크게 기억에 남진 않았다. 마지막 크리스털은 부드러운 푸딩 젤라틴의 탱글이 아니고, 젤라틴 넣은 푸딩을 만들다가 뭉개서 만든 듯한 식감으로 살짝 산뜻함이 있었다.
세 번째 요리는 가을맞이 호박요리인 "땅콩호박 '라비올리'와 캐비어 (butternut squash ‘ravioli’ with caviar)"였다. 테이블에서 캐비어를 넣은 호박소스를 부어주며 마무리해 주었다. 동그랗게 놓인 것이 잘 익은 땅콩호박인데, 아주 잘 익고 그것만도 간이 좋았다. 캐비어는 사실 처음이었는데, 아주 부드럽게 올챙이 같은 느낌이랄까. 올챙이를 먹어보진 않았지만 올챙이하면 생각나는 그런 탱글 하지만 부드러움이 있었다. 라비올리도 파스타가 얇게 그 단단한 식감이 좋았다. 위에 얹어진 세이지칩이나, 호박칩과 같은 것들이 빠삭할 정도가 아니라 아주 얇아서 입안에서 살짝 파삭하고 부서지는 느낌들도 좋았다. 호박의 따뜻한 맛이 가득해서 정말 맛있었다. 내가 가을 하면 떠올리는 호박요리의 맛이었다. 가을다운 메뉴였다.
처음 메뉴들이 나오기 전에 음료를 골랐다. 혼자라 그런지 글라스와인이 준비되어 있다고 안내를 받았다. 와인메뉴를 받아보진 못했다. 혼자니 당연 그럴 거라 생각한 걸까. 어차피 바틀을 마실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논알코올도 있고, 샴페인, 레드, 화이트가 있다 하며- 초반 메뉴들에는 화이트가 어울릴 듯하여 화이트를 말하자 두 가지 와인을 가져다주었고, 그중 샤르도네계열의 와인으로 선택했다. 그렇게 그 와인으로 전채요리까지 맛을 보았다. 와인에 대해서는 크게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어울리지 않을 때 페어링이 어긋날 때는 요리나 술이나 서로의 맛을 죽인다는 건 경험으로 안다. 그런 느낌이 없었으니 페어링이 나쁘지 않았다는 거겠지.
한 번에 이어나가 쓰려했지만, 9가지 메뉴를 한 길로 쓰기에는 쓰는 나도, 읽는 이들도 이 안에서 길을 잃을 것 같아 두 편에 나누어 쓰려한다. 다음 편에서는 이제 드디어 메인요리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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