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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시작, 나 홀로 앉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디너

by 이확위

많은 이들이 고대하던 바로 그 역대급으로 긴 추석 연휴가 왔다. 개천절에 한글날까지 더해지니, 거의 일주일을 쉴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안 그래도 추석 연휴 때면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더욱 많은 이들이 여행을 계획했을 것은 틀림없을 거다. 나 또한 그렇다. 다만 여행은 아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해외 학회일정이 딱 추석연휴 기간이다. 부모님께 언제 내려오냐는 연락이 왔건만, 해외 출국 전에 다녀오기에는 그전에 끝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부지런을 떨지 않아 마무리할 것들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래서 죄송하다 말하며, 해외 출장을 다녀온 후에 찾아뵙겠다 말했다.


할 일들이 있으나 집에 있어서는 집중이 안되기에 오피스에 나갔다. 모두가 쉬는 날에 나가니, 간식을 자제하고 있지만- 나를 위한 보상이라며 달콤한 디저트를 가득 안고 연구실을 갔더랬다. 그러고는 연휴 첫날, 간식만 먹고 하려던 것을 미처 끝내지 못했다. 연휴 이틀째인 토요일, 또다시 연구실로 가야 했다. 끝내지 못한 일들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날은 디저트보다는 저녁 디너를 예약해 두었다. 모두 끝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왜 이리 하기 싫은 것인지... 딴 짓만 가득하며 겨우 하나 끝내니 어느덧 저녁 예약 시간이 다가왔다. 예약금이 걸려있으니- 안 가면 2만 원을 그냥 날린다. 보상으로 저녁을 사 먹기엔 내가 한 것이 너무 없지만- 그래도 이걸 먹고 내일 더 잘하자고 합리화를 하며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평점이 좋았다. 일단 위치가 내가 있는 곳과 가까운 연남동이었던 게 선택의 1번이었고, 그 후 4.9점/5.0 만점의 높은 평점, 후기도 77개 정도로 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고, 그리고 후기 속에 딱히 불평의 소리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메뉴를 살펴봤을 때, 먹고 싶은 게 몇 가지 보였다. 그렇게 종합적인 이유들로 선택한 곳이었다.


조금은 번화가에서 떨어진 골목에 위치하고 있어서 찾아가는 길목이 어두웠다. 한국이니 괜찮지, 해외였다면 지나가고 싶지 않을 만큼 어두운 골목길이었다. 식당을 들어가니, 잔잔한 모던한 노래들이 나왔다. Dean의 노래라던가. 그런 감성의 노래들이 나오고 있었다. 레스토랑은 따뜻한 느낌이고 밖에서 생각한 것보다 꽤나 넓었다. 완전한 오픈 주방이었고, 두 분이 계셨는데 모녀인듯했다. 모녀가 아니라면 아주 가까운 오너와 직원이겠지.

7시에 예약해서 찾아갔는데, 들어가 보니 레스토랑의 모든 자리가 비어있었다. 한 테이블이 아직 미처 치우지 못한 그릇이 있었으니- 내가 오늘 밤의 유일한 손님은 아닌 듯했다. 다행인 일이었다.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말이다. 안내받은 자리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안내해 주는 종업원분이 내게 이름이 특이해서, 어떤 분일지 기다리고 있었다 말했다. 그러면서 가벼운 스몰톡을 나눴다.


메뉴판을 살펴본다. 흠.. 스타터에서 맘에 드는 게 몇 가지가 있었다. 사과 양배추 샐러드,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브리, 멜란자네 가지는 항상 좋아하고, 버섯과 한치(안타깝게도 준비 중), 그리고 좋아하는 비프타르타르. 스타터가 고민되기에 다른 메뉴들을 살펴보고, 그와 어울리는 스타터를 고르기로 맘을 먹었다.

사이드메뉴에는 포카치아 빵과 이탈리안 피클이 있었다. 컬리플라워, 차요테, 셀러리 등의 채소들을 이용했다기에 가격도 저렴하여 이건 무조건 시키자 생각했다.

파스타를 살펴본다. 보는 순간 끌린 건, 버터레몬앤쵸비 파스타다. 고민도 없이 파스타를 골랐다. 그런 후, 또 다른 고민의 시간이었다. 스타터, 파스타, 메인까지 시키면 분명 양이 너무 많을 터였다. 스타터를 시키느냐- 메인을 시키느냐 사이에 고민하다가 나는 메인 문어를 선택했다.


주문

-버터 레몬 엔쵸비 파스타

-문어구이

-이탈리안 야채피클

+글라스 화이트와인 (샤르도네+파세리나)


나에게 한꺼번에 줄지 따로 내줄지를 물어보더라. 따로 먹는 걸 선호하기에, 어떤 순서가 좋으냐 물었다. 메인요리가 메인이지만- "메인 메인"의 느낌은 조금 약했기 때문이다. 어느 순서도 괜찮다기에, 건강을 위해 단백질을 먼저 먹기로 했다. 문어를 먹고, 그다음 파스타를 달라고 했다.


문어 Polpo

-동해안 피문어 구이, 감자 벨루떼, 표고버섯, 은두야(칼라브리아식 매콤소스), 파슬리

문어가 나왔다. 문어를 팬에 구워서인지 그 구이에서 오는 향이 있었고, 기다란 문어 다리 하나 구이 밑에 깔린 감자 벨루떼는 치즈가 듬뿍 들어가 꾸덕해진 매쉬드포테이토 같았다. 큼직하게 통으로 혹은 절반으로 잘려 구워진 표고와 커다란 이파리로 파슬리가 두어 개 얹어져 있었다. 올리브오일을 조금 뿌려내고 마무리한 모양새였다.

문어구이라고 했는데, 나는 스페인에서 먹었던 문어를 생각해서 부드러운 식감을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의 문어요리들처럼- 제법 쫄깃한 식감이 살아있었다. 찾아보니 스페인, 특히 갈리시아 지역의 Pulpo a la Gallega는 문어를 오래 삶은 오일에 담가 부드럽게 만드는 방식인 반면, 이탈리아의 Polpo alla griglia는 직화나 팬에 굽기 때문에 콜라겐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 탄력 있는 식감을 남긴다고 했다. 내가 맛으로 느낀 스페인에서의 문어와 이 식당의 문어 식감의 차이는 조리법 차이에 의한 결과였던 것이다.

문어를 먹고는 표고를 먹었는데, 표고의 식감이 문어와 어울렸다. 너무 부드럽고 촉촉한 그런 버섯이 아니라- 살짝 쫄깃하고 탱탱한 버섯의 식감이었다. 왜 그럴까 찾아보니 표고는 구웠을 때 세포벽이 단단해지면서 탄성 있는 식감이 생긴다고 했다. 그 결과 콜라겐 많은 문어와 함께 비슷하게 서로 탄성 있는 저항감으로 식감이 서로 어우러졌던 것이다.

앞선 설명에서 처럼 치즈가 듬뿍 들어간 듯한 매쉬드 포테이토는 맛없없(맛없을 수가 없는) 조합이지 않은가. 어쩌면 너무 무난하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맛이다. 벨루떼는 원래 프랑스식 소스 기법 중 하나로, 루(roux, 밀가루+버터)에 육수나 크림으로 걸쭉하게 만드는 소스라 했는데- 여기서는 감자를 이용해서 만든 모양이다. 전분과 지방이 많아서 마치 치즈가 들어간 듯 느껴진 모양이다.

다만 파슬리는 왜 다지지 않고, 덩어리처럼 커다란 잎 채로 얹었는지는 이해되지 않았다. 딱히 그게 비주얼로 더 좋지도 않았고, 먹을 때도 좀 더 한 입 한입에서 파슬리의 향이 얹어졌다면 모두 묵직한 맛에서 한결 층을 쌓아주었을 텐데 말이다.



이탈리안 피클, 자르디니에라 Giardiniera

컬리플라워, 차요테, 셀러리 등 여러 채소들로 만들었다는 피클이 아이스크림 그릇 같은 곳에 담겨 나왔다. 문어를 먹다가 하나를 먹자 아주 개운했다. 컬리플라워의 식감이 좋았다. 차요테는 처음 먹어보는 뭔가 뿌리채소 같은 것이었는데- 아삭한 식감이 아주 좋더라. 살짝 약간 단맛과 함께- 새콤함이 돌고 마지막에 향긋한 향이 있었다. 올리브오일도 들어간 듯하고 물어보니 올리브오일과 레몬제스트를 뿌렸다했다.

피클이 맛있어서, 바로 이 Giardiniera라는 이탈리안 피클을 어떻게 만드는지 찾아보았다.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 유래된 잘게 썬 여러 채소를 식초와 향신료에 절인 피클이라 했다. 포인트는 식초와 올리브유를 섞은 절임액이고, 보통 화이트와인 식초, 물, 소금, 설탕, 향신료의 조합에 끓여서 채소를 살짝 데친 후, 올리브오일을 더해 병에 담는다더라. 이 피클은 집에 돌아간 후 언젠가 직접 만들어먹게 될 것 같았다.



버터레몬앤쵸비 파스타 Butter, lemon, e anchovy

-파파르텔레(넓은 면 파스타), 시칠리아 앤쵸비, 케이퍼, 버터, 레몬제스트

파스타가 나왔다. 나오자마자 앤쵸비에서 오는 약간의 fishy 한 향과 함께 향긋한 레몬제스트 향이 훅 올라왔다. 넓적은 면에 소스가 야무지게 잘 묻어있는 게 먹음직스러운 모양새였다. 파스타를 한 입 먹어본다. 적당히 잘 익어 씹히는 맛이 살아있는 파스타에, 거의 구덕보다는 살짝 오일리하게 묻어있는 소스 속에서 앤쵸비의 감칠맛과 짠맛이 함께 확 느껴졌다. 그런 후, 그 위로 레몬제스트의 상큼함이 얹어져 있었다. 감칠맛이 아주 좋았고, 어떤 이들은 짜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는 이 짠맛과 감칠맛이 좋았다. 짠맛은 앤쵸비뿐 아니라 케이퍼도 함께 내 준 모양이다. 후추가 뿌려져 있었는데 먹다 보니, 고추가 들어간 것 같지 않은데 매콤함이 느껴졌다. 감칠맛과 짠맛에 후추가 닿으니 맵게 느껴지는 건가? 하는 생각에 검색해 보았다.

앤쵸비는 감칠맛 성분이 풍부해서 우리의 미각세포를 자극하고, 후추의 매운맛은 피페린(piperine)이라는 화합물인데, 고추의 캡사이신처럼 우리의 통증 수용체를 자극할 수 있다고 한다. 캡사이신처럼 강하게 자극하진 못하는데, 앤쵸비와 케이퍼에서의 감칠맛과 짠맛의 콜라보로 혀의 미뢰를 더욱 자극시켰고, 이러한 혀에 후추의 자극이 가해지면서- 평소보다 혀가 후추에서 더 매운맛(통각)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엔쵸비의 짠 감칠맛과 후추의 피페린 자극이 만나면, 혀와 뇌가 매운맛으로 착각하는 건, 원래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요리들에서 고추 없이도 매운 풍미를 내는 조합으로 널리 쓰이는 모양이었다. 신기하고 재밌었다. 맛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버터레몬앤쵸비 파스타는, 밸런스가 굉장히 중요할 것 같았다. 레몬즙을 넣었다면 산미였겠지만- 레몬 제스트이기에 향만이 가해져서 맛에서 레이어, 층을 느꼈다. 버터에 오일에 어쩌면 느끼할 수도 있다 싶은 것을 레몬제스트로 잡아주고 있었다.

버터의 부드럽고 묵직한 맛을 레몬으로 잡아주고, 버터의 부드러움 속에 앤쵸비가 짭짤한 감칠맛을 더해주는데, 여기에 후추를 통해 살짝 매운맛이 가미되어 단순히 짜고 기름진 느낌을 정리해 준 자극이 되었다. 이들 중 하나라도 빠지면 바로 무너질 것 같은 균형이었다. 그런 균형 있는 조합이 재밌었다. 내가 몰랐을 뿐, 꽤나 클래식한 조합일 것 같았다.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먹어봐야지-라고 생각했다.



서비스로, 꿀송편

내게 추석인데 어디 안 가시냐고 묻기에, 추석에 해외출장이 있다 말했다. 그래서였을까? 파스타를 다 먹고 나니, 내게 송편 두 개를 접시에 내다 주었다. 디저트로 먹으라면서 말이다. 이미 탄수화물을 충분히 먹었지만, 지금 먹지 않으면 올해 추석에 송편을 먹지 못할 것 같았다. 고마운 마음으로 송편을 집어 들었다. 한입 베어 물어보니 달콤한 꿀과 깨 같은 것이 섞여있는 꿀송편이었다. 송편 떡도 아주 쫄깃했다.


넓은 식당 안에서, 나와 요리해주고 서빙해주는 분들만 함께였다. 잔잔한 음악이 비어있는 공간을 따스하게 채우고 있었고- 맛있는 음식이 내 마음과 내 배를 기분 좋게 채워주었다. 나는 한입 한입 맛 보며 맛에 대해 생각할 게 많아서 였는지, 외로움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음식이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면, 혼자인게 서글펐을지도 모르지만-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디너를 마치고, 오래간만에 연남동을 걸어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연남동은 젊은이들로 가득 차 활기찬 에너지를 뿜고 있었다. 대학원 다니던 시절, 거의 매주 이곳을 왔었던 것 같은데 - 요즘은 왜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도 딱히 누군가와 왔던 건 아닌데 말이다. 더 많이 둘러보고, 더 많이 즐겨야지.



연남동, 노노스탄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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