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같이 오늘도 일어나 모닝페이지를 적어나갔다. 바로 떠오른 생각들을 친구가 선물해 준 만년필의 부드러운 필기감으로 빠르게 적어 내려간다. 어제 하루에 대한 이야기들로 내용을 채워나간다. 대부분이 어제 했던 실험들과 아이디어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는 연구원이다. 박사학위를 받고, 잠시 해외에서 연구원생활을 하고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대학교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지난 학기부터는 운이 좋게도 강의를 맡을 기회가 있어 강의를 하고 있고- 나쁘지 않았는지, 이번 학기에도 부탁을 받아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이 일을 계속 하고 있는 데에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덕분이라 종종 생각한다. 흔히들 인터넷에 떠도는 학생에 대한 배려 없는 "지도교수"를 나는 만나지 않았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만난 연구책임자인 교수님 세 분은 모두 주변인들이 흔히 "사람 괜찮다" 라 하는 이들이었다.
나의 박사 지도교수님도 싫은 소리 잘하지 못하는 분이었고- 나는 교수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웬만하면 할 수 있었다. 논문을 투고하면서도, 내가 작성한 부분을 교수님이 수정하셨는데- 그게 맘에 안 든다면 세 번이나 그 부분에 코멘트 메모를 남기며 나의 주장을 어필하기도 했다. 이 정도로 교수님과 가깝게 의견을 나눌 수 있고, 그런 기회를 허락하는 지도교수는 아마 많지 않을 거다. 그러니 나는 박사과정에서 운이 좋았다.
해외에서 지내는 동안, 딱히 좋은 실적을 내진 못했다. 나의 실적과 별개로 그곳의 연구책임자인 교수는 얘기를 나눠보면 정말 친절한 사람이지만- 그 역시 나쁜 소리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다지 잘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도 언제나 북돋아주곤 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지금의 나의 보스를 만나서 함께 연구할 기회를 얻은 것이 무척 행운이라 생각한다. 사실 나는 학위를 받는 동안에는, 연구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떠오르지 않기에- 새로운 주제를 제안하는 동기를 보며 '나는 연구자로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그러다, 해외에 갔고- 그곳에서 연구를 하며 뭔가 새로운 주제들이 여럿 떠올렸고 그 아이디어들을 그 당시의 보스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보스는 조금 듣더니 좋은 생각들이긴 한데, 지금 맡은 주제가 있으니 그것을 끝내고 생각해 보자 말했다. 그렇게 나는 그 많이 제안했던 아이디어 중 막바지에 겨우 하나 조금 건드려보다가 그곳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연구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떠올랐지만, 그것들을 해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처음 내가 지금의 연구실에 온 순간부터, 연구책임자인 보스는 나에게 나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이곳에 새로운 것을 가져다주면 좋겠다 말하셨다. 처음에는 걱정했다. 내가 마땅한 아이디어를 제안하지 못해 나에게 실망할까봐. 내가 의심하는 나의 부족한 실력이 들통나 버릴까 봐. 여기서도 나는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는데-지금의 연구실의 주요 연구 분야가 내가 하던 것과는 달랐다. 나에게는 제법 새로운 분야였는데, 그래서였을까? 나의 접근이 그들의 일반적인 접근과 달랐던 모양이다. 논문들을 읽어나가다가 '에이, 이미 있겠지?'하고 생각하고 찾아보면 관련 연구가 없었다. 그렇게 제법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몇 가지 제안할 수 있었다. 보스는 내게 "좋습니다."라 말했다.
그 후로도 나는 '나는 아이디어가 없어.'라고 생각했던 박사학위 시절과 다르게, 너무 많은 아이디어의 홍수를 경험했다. 보스는 그 후로도 내가 제안하는 많은 것들에 "좋습니다"를 반복했다. 이전의 보스처럼 하나에 집중하라 말하지 않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해보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 하셨다.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모두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혼자 하기에 보스가 좋다고 하는 아이디어가 너무 많아 다른이들 네 명에게 아이디어를 각각 나눠주고는 그걸 지도하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발전시켜 실험을 디자인하고 계획하고, 실행하는 거의 온전한 독립연구자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이제 2년 남짓 연구를 하고 있다. 돈에 관해서는, 나와 같은 위치의 사람들은 말한다. "박사학위 가진 사람들 중 가장 조금 받는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개의치 않고 싶다. 나는, 어차피 혼자 살고 있고- 나 혼자 살기에는 부족할 것이 없었다. 나는 크게 갖고 싶은 게 없기도 하다. 내가 하고 싶어 한 것들은 지금의 경제력으로는 해낼 수 있었다. 물론 보유한 자산 같은 것은 없지만, 미래를 위한 재테크보다 지금 당장 일의 즐거움이 나에게는 더 크게 다가왔다. 돈을 더 번다고 즐겁지 않은 연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종종 지금 이곳처럼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맘껏 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머지않아 다른 곳에 자리를 잡으며 떠나야 하는 나의 미래에도 지금과 같은 즐거움이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오늘의 모닝페이지의 내용에 그런 생각들이 담겼다. 어제의 연구 결과들과 새로 생각해 둔 아이디어에 신이 나서, 누군가에게 자랑하질 못하니 모닝페이지에 두 페이지를 빼곡히 모두 쏟아낸 것이다. 그러면서 마지막 페이지에서는 '이렇게나 신나게 쏟아내다니 나 이 일이 정말 즐겁구나.'라는 생각으로 이르게 된 거다.
그렇게 다시금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 일을, 연구자라는 이 직업을 즐기며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공부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닐 것 같다. 물론 뭔가를 배우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나는 창의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이 일이 좋은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하루하루가 같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점이 나는 좋았다. 새로움을 위한 일, 내가 재밌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내가 가능하면 학계에 남고 싶어 한다고 느끼게 된 계기였다. 물론, 학계에 내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 즐겁지 않은 연구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연구를 했었던 경험이 있기도 했다. 그때에 나는- 일상 속에 너무 많은 기쁨이 있었음에도, 내 삶이 좋지가 않았다. 나는 일에서 성취감이 있어야 했다. 일, 직업이란 것에서 나는 삶의 많은 가치를 느끼고 있었다.
최근에는 조금씩 종교적 믿음이란 것을 가져보려 애쓰고 있는데, 내가 믿음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은 의문스럽다. 하지만 조금은 달라진 것이 삶의 방향이라 하겠다. 요즘 매일 아침 이런 다짐을 한다.
'나의 삶이 나를 위함이 아닌 세상에 보탬이 되게 하소서. 나의 연구가 나의 만족이 아닌,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되게 하소서.'
그런 마음으로 출근을 하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정말 신이 있는 건지, 나의 기도를 들어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마음을 가진 후로 연구에서 보다 진전을 보이고 어떤 가능성의 결과들이 보다 많아졌다. "유레카"를 외칠 정도의 발견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 한편으로 남지는 않을 듯 한, 어느 정도의 이 분야 사람이라면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그런 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생각보다 연구자라는 직업을 사랑한다고. 누군가는 귀찮다고 하는 과제를 위한 연구계획서에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채워나가는 거며,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논문을 써 내려가는 것이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전체 연구를 설계하고 실행에 옮기는 이 모든 것들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모두가 100%로 즐거운 것은 아니다. 연구에서는 그럴 수 없으니까. 누군가는 말한다. 연구=Research는 "Re"-다시, "Search"- 찾는 거라고. 계속해서 다시 시도하며 찾아가는 거라고 말이다. 여러 차례의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연구라는 이 일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은, 그 실패를 넘어서고, 나의 생각이 맞다는 결과를 마주한 순간의 희열이다. 그 맛을 한 번 보았고, 두 번 보았고, 그렇게 그 경험이 누적되면서-나는 이 일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일상 속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것이 일이다. 그렇기에 일에서 즐거움이 없이는 나는 내 삶에서 만족감을 얻기는 힘들 듯 싶다. 요즘의 내가 전보다 나를 좋아하고, 내 삶을 좋아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일을 하는 시간들에서 오는 만족감들이 내 삶을 채워주고 있기 때문일 거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자, 나는 내가 무척 행운임을 알았다.
내가 가진 것은 실력이 아니라, 행운이었다.
이 일을 좋아할 수 있다는 행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을 더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 오랫동안 내 삶을 차지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이 내 삶에서 보다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기를.
또한 이 일이 나만의 만족에 그치지 않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이 되기를
모닝페이지의 기록
내가 다른 일에서도 이런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의 직업을 더 소중히 여기며 보다 오래도록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2026.03.18. 모닝페이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