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안정적인 자리를 찾아야 할까?

by 이확위

해외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 친구네 연구실에 백발의 허리도 약간은 구부정한 연구원이 계셨다. 그곳은 국가지정된 학교 연구실들이었는데, 학교가 아닌 연구소 소속으로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그 모습이 멋졌다. 어떤 연구를 하는지도 몰랐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그렇게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 박사 후 연구원이라는 비정규직으로 계약을 연장해 가며 계속 연구를 해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그러다가 계약 갱신 시기가 다가오면서

'연구실에 펀딩이 없으면 어쩌지?'

'내가 결과를 못 냈는데, 나랑 갱신 안 해주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고, 언제 보스에게 가서 말을 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그러면서, '아 이런 게 사람들이 말하는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의 어려움이구나.'하고 느꼈다. 그 압박을 계속해서 견디는 삶은 너무나도 힘들 것 같았다.


그곳에서 마땅한 실적을 내지 못했지만, 운이 좋게도 지금의 연구실에서 제안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이제 2년째 일하고 있다. 앞선 글에서도 적은 적이 있는데, 나는 내 일이 좋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에서의 내 일이 좋은 것 같다. 주변에서는 모두들 하루빨리, 자리를 잡기를 기대하고-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모두가 말하고 있는 듯하다.


반년 전쯤, 옛 박사과정 지도교수님을 만났다. 교수님과는 사이가 좋고- 지금 일하는 곳과 가까운데 있어서 실험이 필요하거나 하면 가서 장비를 사용하며 도움을 받기도 한다. 교수님께 요즘 연구에 대해 의견도 여쭙고 하며 대화를 하는데, 교수님은 내게 "얼른 자리 잡아야지"라고 하셨다. 너무 파고들어 가다가는 논문 내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며. 지금 내게 중요한 게 논문 편수라고 하셨다. 돌아오면서도,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의 데이터만으로도 정리를 하면 논문을 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더 파고들어 해결하고픈 내용들이 있고, 이것들을 하면 더 좋은 연구가 될 것 같았다. 나는 그게 궁금하고, 그게 하고 싶었다.


생각을 했다. 나는 아카데믹, 학계에 남고 싶으니까- 학교 어딘가의 조교수 자리에 지원할 거다. (전에도 지원했다가 발표에서 떨어진 경험 한번 외에는 모두 서류에서 탈락했다.) 지금 연구들이 결과를 내면, 어쩐지 가려고 하면, 어딘가는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건 내 오만한 생각일 수도 있다. 교수 자리 TO는 매우 적고, 내 분야의 TO가 나야만 지원을 할 테니, 운도 좋아야 할 터였다. 그럼에도 지금 진행하고 있는 것들을 내가 잘 마무리해 낸 다면, 나는 어딘가는 내 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계속해서 강하게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어딘가를 구해서 간다 하면 이제 조교수로 시작을 하겠지. 자기 연구실을 꾸리고 학생들을 모집하고, 수업도 여러 개 하게 될 것이고, 연구비 수주를 위해 연구 계획서들을 엄청나게 쓸 것이고, 연구환경은 아직 충분치 못하니, 협업을 위해서 끙끙거리며 힘들어할 거다. 나는 문득, 그러는 동안 지금의 내 아이디어들을 연구 결과로 내기도 전에, 그 연구결과들이 새로움에서 어느새 구닥다리가 되어버릴지 모른다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의 창의력이 그저 고갈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정된 삶이... 정말 내게 필요한 걸까.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이곳에서, 조금만 더 나의 아이디어가 현실이 되어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 때까지- 이 재밌는 일을 더 하면 안 될까? 그런 생각들을 오늘의 모닝페이지에 적어갔다. 사실 어젯밤, 두 AI에게 각각 물어보고 그 답을 비교했다. 모두 같은 대답을 했다. 지금 있는 곳에서, 지금의 연구를 완성하라고. 그렇게 좋은 결과를 내면-그다음엔 오히려 지금 구하는 곳보다 좋은 곳을 갈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게 내게 힘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모닝페이지에 나의 생각들을 정리하며 다짐의 글을 썼다.

지금은 안정이 아닌, 재미를 따라가 보자고.

조금만 더 재미있게 지내보자고.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보스와의 미팅이다!

빠른 시일 내에 미팅을 잡고 내 상황과 생각을 전달해야지.

모든 게 잘 되길 바라본다.


모닝페이지의 기록

지도교수님은 말하셨다. 논문 편수가 중요하다고. 얼른 정리해서 논문 낼 생각을 하라고. 얼른 자리 잡아야 하지 않냐고 말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곳에서의 연구가 정말이지 즐겁다. 그리고 요즘의 아이디어 홍수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데, 다른 곳에서 과제 따기, 협업 어려움, 기반 부족, 연구 학생 모집 문제, 수업 부담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허덕이다가 지금 머릿속의 아이디어들이 모두 사라질까 두렵다. 그런 점에서 나는 - 지금 내가 떠올리고 제안한 연구들을 계속하고 싶다. 우선은 이것들을 세상에 내놓고 싶다. (2026.03.21. 모닝페이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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