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맨 손으로도 우리는 축제를 만들었다

[1부 제도와 권력의 무게]

by 어울리는음


1기 대표회의 임기의 끝이 보이던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이미 오래된 피로감 속에 있었다.


해야 할 일들은 쌓여만 가는데, 회의실 의자들은 자꾸 비어갔다.

그 몇 개 남지 않은 의자들 위로, 지친 한숨만이 쌓여 갔다.


그런 시기에, 넌지시 들은 한마디가 있었다.

“지인이 부녀회를 만들고 싶다고 하던데, 가능할까.”


특별한 목표나 기대는 없이 건넨 말 같았지만, 묘하게 마음이 일렁였다.



자생단체를 만드는 것은 주민의 자유지만 공동체활성화 예산에서 자생단체에 지원금을 받으려면 대표회의의 승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표회의 임기 전에 회의를 통해 반드시 의결해야만 했다.

그때 그 절차를 놓치면 다음 기회는 기약이 없는 상황이었다.

2기 대표회의가 언제 구성될지도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내 예감대로 결국 2기 조직이 되기까지는 한참이라는 공백이 있었다.-

그래서 임기 막바지, 마지막 회의를 개최해 부녀회 안건을 올리기로 했다.


문제는 사람을 모으는 일이었다.

자생단체 등록을 위해 부녀회 구성인원을 10명 이상 모으는 것도 필요했고, 마지막 회의를 참석할 동대표도 모아야 했다.


그 무렵 동대표들 몇몇은 회의 참석여부 물음에 답조차 하지 않는 시기였다.


“이번 회의만큼은 꼭 참석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나는 마치 나의 개인적인 일을 부탁하 듯 읍소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이것만큼은 해두어야지.’

안될 수도 있다는 불안함과 동시에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으며, 회의 직전까지 다시금 동대표 카톡방에 호소했다.


그렇게 겨우 과반수를 채웠다.

회의가 개최됐던 그날, 안건이 통과되자 회의에 참관했던 부녀회원들이 환호했다.


나는 그제야 마치 오래 잠겨 있던 숨을 내쉬듯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임기는 끝났는데 오히려 오랜 시간 멈춰 있던 바퀴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하는 듯한 순간이었다.



다급히 회원을 모집한 탓에 모인 사람들이 많지 않아 구성인원 이름을 채워야 했고, 그 명단 속에는 나의 이름도 포함시켰다.

나는 “도움이 필요할 때 돕겠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마음 한편에서는 이미 참여를 각오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부녀회 첫 총회 날, 여성들이 동대표 회의실을 빌려 둘러앉았다.

아는 얼굴과 모르는 얼굴이 섞여 어색하면서도 훈훈한 공기가 흘렀다.


나는 처음에 그냥 조용히 앉아 들으려 했지만, 회의가 시작되자 자꾸 입이 열렸다.

규정 제정에 의견을 내고, 다른 회원의 말에 덧붙이고, 우리의 미래 방향을 제안했다.


그날 집에 돌아오며 문득 웃음이 났다.

‘나 또 이렇게 되는구나.’

내 웃음엔 피로와 설렘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부녀회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됐다.

주민공동시설 내 DIY실 한 곳을 부녀회실로 찜했지만 그래봤자 텅 빈 콘크리트방 하나였다.


사실 주민 복지를 위해 설계된 주민공동시설 내 공간들 실정은 하나같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특히 건설사에서 배치해 둔 ‘주민카페’ 역시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늘 문이 잠겨있는 회색빛 공간이었다.

삭막한 먼지바닥 위로 서늘함만 흐르는 곳이었다.


본사에서 책임져주지 않는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우리는 색을 입히기로 결정했다.


관리소는 귀찮은 일이 생길까 봐 ‘굳이 이런 걸 해야 하나‘라는 태도로 미적지근했지만, 우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부녀회가 직접 꾸미고 부녀회가 운영하겠다고 사용 신고만 잘해달라고 했다.


육아 고질병으로 손목이 시큰거리는 엄마들 투성이었지만, 노동요를 틀어놓고 한바탕 수다를 나누며 신나게 페인트 롤러질을 했다.

무료 나눔 가구와 조립가구를 직접 마련하고, 집안 살림들을 모아 인테리어를 채워갔다.

공동체 활성화 예산에서 입주민 사업장에 커튼과 조명도 의뢰했다.


며칠이 지나자 회색빛 콘크리트는 드디어 따뜻한 색을 입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형식도, 위계도, 허례허식도 없었다.

오직 함께 만들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다.


햇빛이 유리창을 통과해 우리의 정성이 묻은 벽을 사선으로 비추는 순간, 우리는 한참을 감탄하며 바라봤다.

“잘했다, 우리. 너무 잘했다.”



막상 주민카페가 완성되자 관리소는 돌연 태도를 바꿨다.

“좋은 일 하셨네요! 정말 대단해요.” 라며 사진을 찍고, 실적 보고용으로 자료를 챙겨갔다.

우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억울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쨌든 우리의 손끝으로 만든 공간이 이제 누군가의 자랑거리가 되었으니까.


그 무렵 부녀회 실무를 맡은 한 회원이 지자체의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을 제안했다.

“그래요 이왕 하는 거, 우리 이름으로 진짜 사업 하나 해보자.” 다들 눈을 반짝였다.


주말 오후, 주민카페에 모여 계획서를 썼다.

아이디어를 짜고, 예산을 세우고, 회의가 더 필요하면 육퇴 한 늦은 밤에도 머리를 맞댔다.


얼마 후, 선정 소식이 전해졌다.

될 것 같으면서도 될 줄 몰랐던 우리라 더욱 어안이 벙벙했다.

“헉, 우리 해냈다!“


그 사업지원금은 우리의 열정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자생단체 예산을 대신해 주었고,

절찬리 행사를 치러 가는 한 해를 발돋움해 주었다.



첫 해의 가장 큰 행사는 가을 축제 겸 아나바다 장터였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들고 나와 “천 원이에요!”를 외쳤고, 어른들은 옷가지와 직접 기른 농산물을 나눴다.

분수대 근처엔 돗자리가 깔리고, 테이블엔 중고 책과 장난감이 쌓였다.

햇볕 아래 반짝이던 물건들보다 더 빛나던 건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행사준비는 생각보다 은근히 할 일이 많았다.

전기 연결을 도움 받으려 관리소에 몇 번이고 찾아갔고 적극적이지 않은 당직자 몇 명과 입씨름을 해야 했다.

처음엔 화가 났지만, 나중엔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이렇게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부녀회 회원들은 일당백이었다.

행사 며칠 전까지 빈틈없는 진행을 위해 마무리 회의를 하였고,

당일엔 남편들을 동원해 천막을 세우고, 현수막을 달았다.

두 손 가득 행사용품을 나르고, 콧등엔 땀, 입가엔 활기 찬 웃음이 있었다.


관리실의 도움은 전혀 없었지만 기대하지 않은 만큼 우리는 실망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건 남을 위한 행사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행복을 위해 만든 축제였으니까.



소소하게는 아파트 옥상정원 꾸미기부터 동네주민들을 모아 단체로 관광버스 타고 떠난 호수 플로깅까지, 알찬 한 해를 보내고 행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커졌다.


다음 해에는 원데이워터축제, 송년의 밤 공연기획, 그리고 마침내 빅히트 친 여름 맥주축제까지.


맥주축제날 저녁, 해가 지고 불빛이 켜졌을 때 분수대 주변의 분위기는 마치 다른 세상이었다. 분수와 조명에 흥분한 아이들이 까르륵 대며 뛰어다니고, 맥주잔을 시원하게 비워나가는 어른들, 버스킹 전문 가수의 활기찬 기타 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우리 모두의 손끝에서 태어난 한 여름밤의 꿈같았다.


주민들의 얼굴에도 자부심이 묻어났다.

“우리 아파트 진짜 최고예요.”

한마디 한마디의 응원이 마치 상장처럼 느껴졌다.


사실 나는 동대표 1기를 마치며 다시는 아파트 일에 발을 들이지 않으려 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녀회 일을 하며 마음이 달라졌다.

이건 외로운 정쟁 대신 ‘마을을 함께 만드는 일'이었다.


페인트 묻은 손등으로 콧잔등을 닦고,

아이들이 올라올 소박하고 다정한 무대를 기획하며,

나는 이 단지를 조금씩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의 터전을 위해, 내 손으로 봉사한다는 것.’

그 문장은 내 안에서 신념이 되었다.


회의실 안에서 목소리를 높여야 하던 시절엔 느끼지 못했다.

공동체는 딱하고 치열한 논쟁 속이 아니라, 서로의 손끝이 닿는 그 지점에서 자란다.


그리고 남이 만들어준 성취가 아닌, 우리 스스로 세운 자존감의 빛은 눈부시도록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