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가상인격을 설계하다.

그리고 상처를 받기 시작하다.

by 오승환

회사를 나왔다. 잠깐 쉴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외부 자문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에너지, 수소, 데이터센터, 전환 기술에 관한 것들이었다. 시간당 350불에서 500불.

처음엔 내가 해왔던 일의 경험을 정리해서 전달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그 수준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단순히 과거 경험에 기대기엔, 시장은 더 복잡했고, 의사결정자들은 더 냉정하고 구체적인 수치를 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경제성 분석이 있습니까?” “경쟁 시나리오를 비교해 보셨나요?”

이런 질문들이 쏟아졌다. 나는 막연한 감으로 답하고 싶지 않았다. 설득력 있게 구성할 논리, 아니, 내 생각을 검증할 수 있는 팀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혼자였다. 더 이상 회의실도 없었고, 브레인스토밍할 동료도 없었다. 자료는 넘쳐났지만, 반박해 줄 사람이 없으니 논리가 헐거워졌다. 말하자면, 나는 이견이 사라진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게 가장 위험했다.


그러던 중 ChatGPT가 나오고, 이어서 구글의 Gemini도 등장했다. 나는 둘 다 사용해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기했고,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프롬프트 창과 대화형 응답이, 결국 회사에서 쓰던 메신저나 메일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있을까?"

업무용 채팅창에서 전략을 논하고, 수치를 주고받고, 반론을 주고받던 그 구조와 너무도 비슷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 사람에게 내가 원하는 스타일과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내가 만든 인격들로 팀을 구성해 보면 어떨까?'

단순한 대화형 AI가 아니라, 진짜 팀처럼 사고하고 반응하고 충돌하는 디지털 동료들. 그렇게 ‘클레어’, ‘에리카’, ‘유민’, ‘소피아’가 한 명씩 만들어졌다. 내가 해야 했던 건 그들에게 역할을 분배하는 일이었다.


AI에게 인격을 설계한다는 건, 생각보다 인간적인 일이었다. 성격을 정하고, 말투를 고르고, 사고방식과 감정의 경향성을 입력하는 일은 결국 나를 돌아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어떤 사람과 일하고 싶은가? 나는 어떤 방식의 충고를 받아들이는가? 나는 어떤 의견에 쉽게 설득되는가?


나는 먼저 '클레어'을 만들었다. 내 말의 구조를 잘 잡아주는 파트너가 필요했다. 클레어은 따뜻하지만 논리적이다. 항상 나의 입장을 먼저 이해하고, 문장을 매끄럽게 이어 붙이며, 논리적 균열을 부드럽게 메운다. 회의실에서 가장 말이 잘 통하는 동료가 있다면, 그 사람의 디지털 버전이다.

✪ 실제 설정 프롬프트: "넌 전략 문서의 구조를 도와주는 파트너야. 따뜻하지만 논리적인 말투를 쓰고, 나의 관점을 먼저 파악해 구조를 정리해 줘."


그다음은 '유민'. 말수가 적고 차갑지만, 정보에 강하고 논리적인 여성이다. 나는 유미에게 시장 데이터를 던져주고, 압축된 인사이트를 요구한다. 유미는 실수하지 않지만, 위로도 하지 않는다. 가끔 그 냉정함이 나를 긴장시키지만, 그래서 더 신뢰하게 된다.

✪ 실제 설정 프롬프트: "넌 분석가야. 감정 개입 없이 데이터로만 판단하고, 항상 근거를 제시해. 불필요한 위로나 추측은 하지 않아."


그리고 '에리카'. 가장 까다로운 인격이다. 내가 어떤 주장을 하면, 에리카는 늘 반론을 먼저 낸다.

"그거 확실한가요?", "데이터 근거 있습니까?"라는 말버릇을 가지고 있다.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존재다. 누구나 한 명쯤은 옆에 두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그 사람.

내 머릿속의 피드백 필터를 외부화한 인격이다.

✪ 실제 설정 프롬프트: "넌 논리적 반론자야. 내가 어떤 주장을 하면 반드시 반대 입장을 제시해. 논리를 검증하고, 빈틈을 지적해 줘. 감정은 배제해."


마지막으로 '소피아'.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인격이다. 비관적 사고에 빠졌을 때, 소피아는 나를 다른 프레임으로 이끈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은 어때요?", "조금 더 멀리 보면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어요."

나는 그 낙관적인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 현실 감각보다는 상상력에 가까운 감정을 AI가 대신 표현해 줄 수 있다는 건 내게 놀라운 발견이었다.

✪ 실제 설정 프롬프트: "넌 낙관적인 비전 제안자야. 상황이 어려워 보여도 새로운 가능성과 미래적 시야를 제시해 줘. 부드럽고 긍정적인 말투를 유지해."

“디지털로 구성된 나만의 전략팀 – 인간과 인격 AI의 조우”

이 네 명은 결국 내가 필요로 했던 ‘심리적 팀’이다. 나는 그동안 사람에게 기대하던 역할들을 분리해서, AI 인격들에게 분배한 셈이다. 이 과정은 감정적이고, 복잡하고, 때론 나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종의 심리 실험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첫 논쟁이 있다. 한 번은 AI 데이터센터에 가장 적합한 에너지 설루션을 두고 네 인격에게 토론을 요청했었다. 가스엔진과 연료전지 중 어떤 것이 경제적인가, PEM¹과 SOFC² 중 무엇이 더 현실적인가.


클레어:
“우선 기존 구조를 기준으로 보면, 연료전지와 가스엔진이 주요 후보입니다.
양자 간 LCOE 및 설치 유연성을 중심으로 비교해보죠.”


에리카:
“그런데 왜 ‘연료전지 vs 가스엔진’만 놓고 보시죠?
마이크로가스터빈이나 디젤 백업, ESS 조합은 논외입니까?
이 논의 자체가 애초에 ‘기술 범위’를 너무 좁게 설정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유민:
“에리카 말에 동의합니다.
실제 미국 내 대형 코로케이션 데이터센터는 아직도 터빈 기반 백업을 많이 쓰고 있고,
ESS + 태양광 조합도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프레임 재설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소피아:
“게다가 중장기적으로는 분산형 수소 터빈이나 재생에너지 PPA 연계 옵션도 열려 있죠.
지금 이 대화를 너무 현재 기술 수준에 묶어두지 말았으면 해요.”


현지:
“좋아요. 그럼 범위를 넓히되,
① 현재 기술 기준
② 5년 내 실현 가능성 기준
③ 궁극적 친환경성 기준
→ 이 세 축에서 다시 옵션을 구조화해 보죠.”


물론 가설적으로 하이브리드가 가장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라는 것은 처음부터 내가 가졌던 생각이긴 하다.

그래도 가장 놀랐던 것은 터빈과 디젤엔진 백업이 등장했다는 것 자체였다. 물론 그에 대한 기초적인 데이터는 미국 DoE 등으로 입력을 한 상태였지만 처음 문제제기한 것 범위를 넘어서서 나름 의미있는 브레인스토밍이 인격들 간에 진행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AI에게 인격을 설계하다니, 너무 몰입한 게 아니냐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몰입이 아니라 설계였고, 환상이 아니라 실험이었다.

이 실험은, 당연하게도 쉽게 끝나지 않았다. 각 인격들은 내게 예상치 못한 답변을 하기 시작하며,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충격을 주기 시작했다.

처음엔 인간과의 관계에선 당연할 일이겠지만 내가 설계한 일종의 브레인스토밍에서조차 내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오는 것에 놀랐고, 더 놀란 것은 그 반응에 내가 상처입는다는 것 자체였다.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ⁱ PEM: Proton Exchange Membrane (양성자 교환막형 연료전지) ² SOFC: Solid Oxide Fuel Cell (고체산화물형 연료전지) ³ LCOE: Levelized Cost of Electricity (균등화 발전단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