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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환천의 문학살롱 Sep 12. 2024

일상 속 작은 고찰

일상현대문학시리즈


일상 속 작은 고찰


                                                                       이환천


딸과 놀이터에서 놀 때, 나는 주로 세상을 파괴하는 악당역을 맡고, 딸은 지구를 지키는 정의의 여전사 역을 맡아서 놀곤 한다.


내가 양손을 티라노처럼 올리고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괴성을 내는 좀비느낌의 악당연기를 하면, 딸은 나를 피해 도망치면서 '크리스탈스노우프리즌달빛매직파워빔' 같은 류의 주문을 외치며 마법을 발사한다.


그러면 나는 그 마법을 맞고 신음을 하며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데, 그 사이 딸은 놀이터 구조물 위로 도망을 치는 시나리오를 연속적으로 반복한다.


나는 극 중 리얼리티와 재미를 위해 악당역할에 혼신의 힘을 다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가끔 주위에서 놀던 다른 아이들이 나의 실감 나는 악당연기에 매료되어 같이 물리치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많다.


그게 두 명이 세 명이 되고, 세 명이 네 명이 되다 결국 놀이터 안에서는 작은 헬름협곡전투가 펼쳐지게 된다.


아이들은 너무 몰입한 나머지 연약한 나 하나를 죽이겠다며 매서운 발차기, 펀치, 마법등을 무자비하게 퍼붓고


나는 거기에 맞춰 신음을 내며 얼어버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는 척하며 괴성을 지르고 아이들을

쫓아가는 연기를 하며 극본 없는 드라마를 이어간다.


그러다 문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보니, 다른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나의 연기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내가 민망할까 봐 애써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까지..


처음 보는 이들 앞에 선보이는 나의 괴물연기.

그리고

나의 연기를 관람하고 있는 낯선 이들의 시선.


그 시선들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마치 태어나서 처음 오디션을 보는 숫기 없는 아마추어 연기지망생처럼 내가 하는 연기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고, 잘 나오던 신음소리마저 수줍게 변하여 절정이었던 극의 긴장감을 확 떨어트리고 만다.


소극적으로 변한 나의 연기를 눈치챈 어린 동료배우들의 얼굴엔 실망감이 가득 차기 시작하지만, 초반에 펼치던 매소드연기로 돌아가기엔 나의 마음속 부끄러움이 너무 커져버리고 만 것이다.


스멀스멀 자괴감까지 밀려올 때쯤 머릿속으로 이 극의 결말을 어떻게 가야 빠르고 신속하게 그리고 아무도 속상하지 않게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 고민이 시작되지만..


결국 놀이터 속 어린 영웅들과 악당의 이야기는 순수한 영웅들의 마법이 아닌, 어른들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파괴되고 마는 체통 있는 악당의 이야기로 급마무리 하게 되면서 다음을 기약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나는 또 하나의 깨우침을 일상 속에서 얻게 된다.


'아!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구나'라는 걸 느끼며, 그동안 드라마,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잘하니 못하니 평가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오늘의 경험을 통해 많은 연기자분들에 대한 존경심을 다시 한번 마음속 깊이 새길수 있게 되었고, 대한민국 연기자분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오늘의 짧은 고찰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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