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여덟 시까지 오라는 공지가 올라왔다. 아들은 요즘 한창 대학 수시를 치르고 있다. 지난번엔 시간이 여유 있어 첫차 태워 보냈는데 이번엔 전날 올라가야 하나 보다.
기차표를 예매하려니 금요일이라 시간마다 거의 매진이다. 오전만 몇 자리 남아 그것으로 했다. 아들은 수업 마치고 순천서 온단다. 숙박앱을 깔고 시험장 근처로 검색했다. 다양한 데가 뜬다. 조식 나오는 호텔을 클릭했다. 비싸다. 아들이랑 둘이 오붓하게 지낼 날이 또 올까? 응. 재수하면 또 와. 여행이 아니라 시험인 걸 깜박했다. 깔끔해 뵈는 모텔로 예약했다.
속도 없이 설렌다. 국화한테 전화해 서울서 만나자 했다. 하필 그날 건강 검진이란다. 아쉽다. 뭣을 할까? 종묘에 가야겠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9>>에서 정말 인상 깊었다. 정전 사진만으로 기운에 압도당했다. 연극도 한 편 볼까나?
금요일. 남편한테 애들 밥 잘 챙길 것을 신신당부하고 서울로 출발했다. 예전엔 지하철 타려면 공부하고 갔는데 요샌 지도가 잘 알려줘 별 걱정 없이 다닌다. 헤매지 않고 도착했다. 체크인할 때 미성년자가 올 거라고 하니 가족관계증명서를 달란다. 207호. 카드를 대고 문을 열었다. 침대에 깔린 호텔식 새하얀 이불이 당장 눕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생겼다. 애가 내일 입을 셔츠와 바지를 꺼내 대충 걸고 벌렁 드러누웠다. 핸드폰으로 종묘 가는 길을 찾으니 가깝다. 그런데 정전이 공사 중? 헤헤. 잘됐다. 일어나기 싫었는데. 책을 집어 들고 몇 장 넘기다 잠에 빠졌다.
다섯 시쯤 아들이 왔다. 어느새 다 커 먼 길도 척척 찾아온 게 신통방통하다. 연습하러 가야 한대서 저녁부터 먹으러 나갔다. 옆에 샤부샤부 집으로 들어갔다. 지치고 긴장한 탓인지 말이 없다. 이 말 저 말해 봤으나 시큰둥하길래 먹기만 했다.
아이는 근처 악기 연습실로 가고 나는 귤과 방울토마토를 사서 방으로 들어왔다. 연극을 보러 갈까 말까? 해가 짧아져 어둑하다. 서울은 눈을 뜨고 댕겨도 코를 베 간다는데. 귤을 하나 까서 침대에 누웠다. 나 보고 싶은 데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행복하다. 졸린다.
번쩍 눈이 떠졌다. 옆에 잠든 아들이 있다. 언제 왔지? 문 열어 준 기억이 안 난다. 무슨 중노동을 했다고 이리 깊이 잤나? 양치도 안 하고 말이야. 이 닦으니 잠이 홀딱 깬다. 임시저장을 해 둔 글을 손봤다. 티브이를 보고 책도 읽었다. 별짓을 해도 잠이 안 돈다. 잠든 아들 얼굴을 뚫어져라 봤다. 머리칼도 한번 쓸고.
새벽 다섯 시가 좀 넘으니 알람이 울린다. 피곤할 법도 한데 벌떡 일어나 씻는다. 초등학생일 때부터 늑장 안 부리고 학교는 잘 갔다. 공부를 싫어하는 모범생. 숱 많고 긴 머리카락을 말리느라 드라이기가 애쓴다.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온통 검정으로 차려입었다. 까만 나무젓가락 같다. 큰 키는 외탁이고 마른 몸은 친가 쪽이다. 겉만 봐서는 피아노를 겁나게 잘 칠 것 같다. 빈속으로 보내 짠하다. 눈을 감고 하나님을 불렀다. 뭐라 기도해야 할지 몰라, 저나 나나 예수를 믿게 해 달라고 했다. 돈 많은 부모를 만났더라면 실력이 더 나았을 것 같아, 눈물이 한 방울 나왔다.
나도 씻고 나가 산책했다.
열 시, 아들이 돌아왔다. 활짝 웃는다. "엄마, 말이 안 되게 잘 쳐요. 어떻게 여섯 명만 뽑을까? 나는 말이 되게 하고 왔어요. 하하하." 데리고 나가 아침을 먹였다. 다시 모텔로 와 둘이 귤을 까먹으며 퇴실 시간까지 티브이엔에서 하는 '콩콩팥팥'을 재밌게 봤다.
용산역에 좀 일찍 도착해, 옆 백화점에 갔다. 작은애 잠바가 필요하다. 6층 매장에 가니 좋아하는 브랜드가 세일이다. 맘에 드는 것을 골라 가격표를 봤다. 4만 5천 원. 얼른 전화기를 꺼내 네이버에 '리(Lee)잠바'를 검색하니 같은 옷이 최저가 창에 10만 원이라고 뜬다. 와우, 대박. 완전 득템이다.
그러고 보니, 재수해도 내년엔 같이 오지 않을 것 같다. 성인이라 내가 없어도 숙박업소에 들어갈 수 있다. 잠만 자다 가는 것으로 임무가 끝나는구나. 그래도 큰 성공을 거둔 쇼핑 때문에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