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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Jan 15. 2024

손에 주세요



광양에 10시에 도착하려면 8시까지는 준비를 마쳐야 한다.

오늘은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천 일이 넘는 날들이 그냥 한 뭉텅이로 퉁쳐진다.

그 안에 웃고 울었던 시간이 다 희미하다.

별 탈 없이 마무리하니 그저 감사할 따름.



예고 졸업식은 좀 색다를 것 같다며 중학생이 되는 딸이 요란을 떤다.

새벽부터 일어나 머리를 감고 얼굴에 열심히 찍어 바른다.

나도 덩달아 좀 들뜬다.

오늘 같은 날 아침은 건너뛰어도 될 듯.

남편에게 밥 먹지 말자고 하니 그럴 수 없단다.

아, 진짜.

그래, 자식보다 남편이 중하지.

다 떠날 것들이다.


불륜, 도박, 폭력.

이런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 남자랑 쭉 살 가능성이 높다.


누룽지를 끓였다.

달걀을 지지고 오징어 젓갈에 청양고추를 쫑쫑 썰어 넣었다.

김치도 가지런히 접시에 올렸다.


식탁에 차려 놓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 단장했다.

머리카락이 점점 가늘어지고 숱이 줄어든다.

후까시를 열심히 넣었다.

팔이 아프다.


끝으로 립스틱을 바르고 거실로 나왔다.

식탁이 먹은 모양새 그대로다.


여보, 자기 몇 살이지?

먹은 것 정도는 담가 놀 수 있잖아?


남편이 답했다.


자기야.

나 내일부터 밥이랑 반찬 손에다 줘.


이 사람이 또 헛소리로 어벌쩡 넘어가려 한다.

내일 아침에

진지하게

뜨건뜨건한 밥을 손에 올려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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