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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Jan 15. 2024

죽기 좋은 날

행복한 날

 


네 자매가 수년만에 한자리에 있다. 한국 병원 5층 병동. 2인실을 며칠 째 독방으로 쓴다. 병원에 온 날부터 작정한 건지 약 기운을 못 이긴 건지 주무시기만 한다. 깬 것 같은데 눈을 뜨지 않는다. 싸우기 좋은 판이다. 아흔 넘은 노인한테 무슨 새록새록한 생명력을 기대한다고. 병 원인을 두고 책임 공방에 열을 내고 있다. 당뇨 합병증으로 여기저기 망가졌는데 누구도 당뇨가 있는 줄 몰랐다. 몇 달 전 검사에서 별 이상이 없었다. 큰언니가 정성으로 돌보지 않아서 그렇다고 쏘아붙이면 일 년에 몇 번이나 얼굴 비췄냐고 응수했다. 이 볼썽사나운 싸움은 이유가 있다. 돈. 긴병이 될지 모르기에 병원비와 앞으로 들어갈 비용을 누구에게 더 크게 지울지 판가름 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힘이 센 것은 돈이구나. 사는 것에 넌더리가 난다. 그렇다고 내 것을 내놓을 맘은 없으니 나도 별수 없는 인간이다.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할머니가 쇠약해지는 데 보탠 것이 많다. 말 안 듣던 사춘기 시절이 스쳐간다. 불똥이 나한테까지 튀면 어쩌나. 부디 우리 엄마가 승리를 거둬 주길.


 
"언니가 물려받았으니까, 언니가 다 해." 뭐? 물려받아? 치열한 싸움 소리가 멀리 사라진다. 뭣을 받았을까? 너무 궁금하다.
 


엄마가 땅 지번이 적힌 종이를 주더니 시세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란다. 공시 지가 알려 주는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평당 만 원도 안 되는 작은 밭이다. 부동산에 전화해 실거래가를 물었다. 뭐 가격이야 내놓는 사람 마음이지만, 어떤 값이든 아무도 안 살 거란다.





미동도 않고 누워 있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온다. 진이 다 빠져 차갑고 쭈글쭈글하다. 누가 속의 것을 다 빼 먹은 것 같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져 누구도 갖기 싫은 몸. 싱싱하고 물기 가득했을 땐 사랑받았겠지? 키워 준 은혜가 떠올라 내 집으로 모셔 갈까 하는 생각이 잠깐 머물렀으나 이내 버렸다. 다른 걱정보다 할머니 밑을 볼 자신이 없다.


딱 한 달 병원에 있다 가셨다. 누구의 돈도 축내지 않고 말이다. 조금 울었다. 깔끔하게 끝내 준 게 고마워서. 하나도 슬프지 않은 것이 슬퍼서.


 
텔레비전 리모컨을 손에 쥐고 잠과 싸우고 있다. 더 보고 싶은데 졸린다. 휴대폰 시간이 끝났는지 아이들이 하나둘 내 옆으로 온다. 팔, 다리 하나씩 차지하고 몸을 기댄다. 리모컨을 빼 가려고 작은놈이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쉿' 한다. 나머지는 입을 틀어막고 웃는다. 자기들 좋아하는 채널로 바꾸고 간식거리도 내온다. 실눈으로 보니 무척 행복해 보인다. 지금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 모두 나를 사랑할 때. 그러면 다들 슬퍼서 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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