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기분이 나쁘다. 마음을 다쳤다. 울그락불그락 해지는 얼굴을 손으로 감싼다. 침착하자. 이럴 때면 얼른 일의 처음을 생각한다. 어디가 시작인지. 왜 내가 이렇게 화가 나는지. 그래야 어느 수위로 욕을 할지 정할 수 있다. 또, 아무 일도 아닌데 내 약한 부분의 어느 꼬투리가 건드려져서 과도하게 성이 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칠칠 언니. 팔팔 언니와 놀았다. 한모임 안에 있지만 이 두 사람이 먼저 친하고 오래된 사이다. 나는 별로 가깝지 않았는데 이번엔 어쩌다 끼어 함께 여행을 갔다. 어땠냐고? 진짜 진짜 재밌었다. 신혼여행도 이보다 좋진 않았던 것 같다. 다 칠칠 언니 공이다. 잘 때 빼고 내내 웃었다. 나는 고급 유머를 구사하는 사람한테 매력을 느끼는데 칠칠 언니가 그랬다. 저급, 고급 구분이 뭐냐고 물으면 머쓱하지만 내 웃음보가 터지면 고급이다. 하하. 알고 보니 이 언니 꿈이 제2의 박경림이 되는 거였단다. 왕년엔 여수에서 이름 좀 날렸다고 한다.
여행이 끝나는 날엔 진짜 집에 가기 싫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셋 다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팔팔 언니가 조만간 또 뭉치자고 했다. 모두 환호했고 날짜와 장소도 금방 정해졌다. 설 연휴 끝에 중간 지점 담양에서 글램핑.
보자 보자. 설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시댁 갔다, 교회 갔다, 엄마랑 동생을 만나야 하는데. 친정 식구가 문제네. 좀 고생스럽더라도 이번 주 주말에 우리 집으로 모이라고 해야겠다. 전화로 물으니 다 좋다고 한다. 어차피 휴일엔 차도 막히고 말이다. 설에 못 내려가는 대신 용돈을 좀 두둑이 준비했다.
때가 가까워 오는데 단톡방이 조용하다. 예약은 했는지 어디 글램핑장인지, 회비는 얼마 인지. 또 내가 낙지를 준비하기로 해서 얼마나 사야 할지 나눌 얘기가 많은데 말이다.
간, 쓸개 다 빼줄 만큼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니 다시 어색하다. 먼저 톡을 올리기가 영 쑥스럽다. "우리 모이죠? 낙지 잡으로 갈라고요." 놀고 싶어 안달 난 사람으로 보일까, 낙지를 앞세워 농담을 만들어 봤다.
30분이 지났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팔팔이랑 통화로 얘기하고 황여사한테 전달을 하는 걸 깜빡했네."
이번엔 여차저차 어렵고 좀 미루자는 내용이었다.
깜박할 수 있다. 사정이 생기면 약속을 못 지킬 수도 있다. 언제 정했는지 몰라도 둘이 많이 친하니 먼저 얘기할 수 있다. 다 이해한다. 나도 자주 그러지 않던가?
팽당한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전에도 몇 번 있었던 것 같다. 같이 좋아한 줄 알고 온갖 상상이 나래를 펴고 김칫국을 마셨는데 짝사랑이었을 때. 맞아, 그랬다. 아, 그때 조금만 웃을 걸. 그리고 엄마한테 예정에도 없던 돈을 너무 많이 지출했다. 또 뭐가 있지? 아, 결정적으로 정식으로 사과받지 못했다. 그럴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지만 당연한 건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