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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Feb 20. 2024

재혼

또 왔네, 또 왔어. 내 눈치를 한번 슬쩍 보고는 엄말 끌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얼른 안방으로 가 귀를 부엌 쪽 벽에 댔다. 콘크리트 아파트도 층간 소음에 시달리는데 허술한 흙벽이 무슨 방음이 된다고. 다 들린다. 흥, 내가 못 알아먹는 줄 알고? 재취, 재혼, 홀애비. 문맥을 유추해 단어 뜻을 알아차렸다. "지네 할매한테 줘 불고 새 인생 살어." 결혼은 여러 번 할 수 있는 것이군. 내 국어 실력은 중매쟁이 어른이 키운 것 같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드레스 입은 신부는 다 공주님 같던데, 엄마가 그렇게 될 수 있나? 끔찍하다. 난 안 볼란다. 저 촉새 같은 아줌마가 오면 눈을 한껏 찢어 째려보고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자 버렸다. 한밤중 깨면 살이 헛헛해 온기가 필요했지만 엄마 품으로 안 갔다. 말 못 하는 갓난이 동생을 끌어안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발악의 전부다. 
 
효주를 만나러 간다. 험한 것을 겪으며 얼마나 시들었을지 얼굴을 보기도 전에 맘이 아프다. 나도 20년을 살며 머릿속으론 이혼을 수없이 해 봤다. 상상으로도 그건 너무나 지난해 몸을 상하게 했다. 이 힘겨운 걸 해낸 여자는 가련한가, 장한가?
 
카톡에 찍어 준 주소로 갔다. 평수 작은 오래된 아파트. 103동 앞 주차칸에 젊은 여자가 서있다. 차에서 내려 가까이 보았다. 효주다.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예상과 다른 얼굴이다. 탁했던 것이 걷혀 맑고 깨끗한 낯에 살이 빠져 몸의 태가 도드라진다. 스무 살 적보다 더 빛난다. 마흔이 이렇게 찬란한 나이던가? 우리는 말없이 끌어안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학생 때 그랬던 것처럼 팔짱을 깊숙이 끼고 집으로 올라갔다. 효주 딸이 나와 인사한다. 대학생이 된단다. 꼬맹이 때 얼굴이 보인다. 현금을 좀 챙겨 올걸. 이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내온 차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야, 너 만나는 사람 있어, 없어? 왜 젊은 몸을 썩혀. 빨리 좋은 남자 만나." 세상, 하고많은 인사말 중에 왜 이것을 택했는지 나도 모른다. 효주는 수줍게 웃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종일 꽤 진지한 수다를 떨다 헤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카톡을 확인하니 효주에게 온 것도 있다. 화면을 꽉 채운 장문이다. 내 무례함에 잠을 설쳤다고. 방에 아이도 있는데 헤픈 여자 대하듯 남자 어쩌고 하는 농담이 그렇게 쉽냔다.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낯설다. 미안하단 한마디 말만 하고 끊었다.

무슨 소설이었는지 어렴풋하다. 동네에 과부가 생겼는데 남자들이 잠을 못 잤다. 제 남편 지키느라 여자들도 밤을 샜다. 결국 과부는 마을을 떠났다. 나도 혼자 사는 이쁜 효주가 내 가정에 위협이라고 생각했나? 300km나 떨어져 있는데? 아니면 내 몸은 만져 주는 남자가 있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거니? 이러나저러나 썩을 몸뚱이. 그 중매쟁이 아줌마가 되어 효주 딸을 아프게 했을까 봐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서른. 얼마나 눈부신 나이인지 내가 지나오면서도 몰랐다. 효주를 보고 알았다. 내 발악 때문인지 그 홀애비 아저씨가 맘에 안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엄만 재혼하지 않았다. 젊은 날을 독차지 해 놓고 지금 아무 보답도 되지 못한다. 혼자서 기저귀 빨아 입고 자란 것처럼 예의 없게 군다. 오늘 엄마한테 온 전화를 놓쳤다. 다른 사람이면 바로 발신을 눌렀을 텐데 카톡으로 '왜?'라고 보냈다.
 
농담은 아니었다. 엄마한테 미안해 멋쩍은 소릴 걔한테 했나 보다. 그리고 정말, 이다음에 홀로 많은 날이 쓸쓸할까 봐. 그래, 효주 딸은 착해 제 엄마에게 잘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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