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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Dec 13. 2023

잊어버렸어요

초라한 것


엄마한테 갈 때면 가끔 근처 고모 집에도 들른다. 추레하면 괜한 걱정을 할까 봐, 좀 더 치장하고 간다. 자잘한 물방울무늬로 가득 찬 검정 원피스를 입고 잡티를 좀 가려주는 선크림을 발랐다. 립스틱도 진하게 칠했다. "오메, 우리 공주 왔냐?" 나를 공주로 부르고 기억하는 사람이 몇 남지 않았다. 이 말이 그리워 오는지도 모르겠다. 성치 않은 다리로 일어나 반갑게 맞아준다. 손을 잡고 방에 들어가 앉았다. 우리 고모는 촌부로만 늙기엔 미모가 아깝다. 지금은 세월이 망쳐 놓았지만 또렷한 눈매와 투명렌즈를 낀 것 같은 눈동자는 여전하다. "우리 새끼, 으째 이렇게 이쁘까? 아직도 가시나 같어야. 공주야, 느그 아빠가 너를..." 또 눈물 바람이다. 그 뒤 대사는 아빠가 나를 엄청나게 사랑했으니 씩씩하라는 내용으로 30년 넘게 들어온 레퍼토리다. 이제 다 자란 것을 지나 늙는 처지인데 씩씩하라니. 머무는 30분 남짓 나한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죽은 남동생을 보느라 그런다. 이런 애잔한 분위기에 산통 깨는 소리 하는 사람이 있다. 내 남편. "고모님, 백내장 검사해 보셨어요?"
 
할머니도 그랬다. 간식거리를 내주고, 나 먹는 것만 보고 계신다. 하루는 찰밥을 줬는데 안 먹었다. 반색하며 "세상에, 느그 아빠가 목구멍이 간질간질하다고 이것을 못 묵드만 너도 그라냐? 오메, 진수를 빼박았네."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콩이 천지라 싫었지, 넘기는 데 이상은 없었다. 뒤로도  할머니 앞에서 절대 찰밥을 먹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 저세상 아들을 추억하고 있는 것이니까.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훔친다. 어른은 앞뒤가 다른 게 많다. 당신들은 울면서 나한테는.
 
황씨 어른들은 만나기만 하면 아빠 얼굴 잊지 말라고 한다. 간혹 무슨 시험 치르듯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보라고 시키기도 했다. 꽤나 노력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떠올리고, 아빠만 생각하다 잠들었다. 그래서 보고 싶지 않았다. 내 눈에 그릴 수 있어서.
 
술에 진탕 취해 마당에 소변을 누는 것을 보고 나도 저렇게 서서 싸겠다고 따라 했다. 아랫도리를 다 망쳐 놔 엄마한테 맞았다. 사방에 대나무 지천이라 매가 흔했다. 잠에서 깨니 아빠, 엄마 사이였다. 좋기도 했지만 불편도 했다. 두 사람이 붙어 자기를 바랐던 것 같다. 엄마는 아빠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다. 아, 하나 있군. 키가 컸다고. 자기 여자한텐 아주 나쁜 남자였나 보다. 그 여자가 사진 한 장 남겨 두질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엄마가 밉다.
 
연신 춥다고 한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도 몸을 떨었다. 내 것까지 다 아빠 덮어 줬다. 몇 밤이 지났다. 작은아빠와 아는 아저씨가 와서 양쪽에 부축해, 데리고 나갔다. 텔레비전에서 죄지은 사람 잡아갈 때 똑같이 하는 걸 봤다. 꼭 그렇게 보였다. 혼자 서지도 못할 만큼 병이 깊었나 보다. 난 더워서 팬티 바람이었는데 아빠는 두꺼운 잠바를 입었다.
 
아빠가 간다. 기운 없는 고개를 자꾸 뒤로한다. 눈이 마주쳤다.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 날이다.
 
그날 내 눈에 찍어 둔 사진엔 오막살이 같던 우리 집, 아빠의 바랜 회색 잠바,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 그 한편에 사탕수수, 내 늘어진 메리야스가 있다. 다 선명하다. 지금도 거기 그대로일 것 같다. 그런데 점점 아빠 얼굴만 흐릿해지더니, 이젠 아예 지워졌다. 중요한 건 잊고 이런 초라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길래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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