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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Dec 14. 2023

안녕히 가세요

가을 오던 날


발끝에 밀어 둔 이불을 잡아 목까지 올렸다. 새벽 공기가 차다. 가는구나. 끈적했던 연애가 끝나는 것 같다. 열기와 습기의 기세에 질렸으면서도 꼭 이렇게 서운한 마음이 든다. 들러붙어 귀찮게 하더니 이렇게 허망하게 떨어질 줄이야. 뚱뚱해진 남편 배를 끌어안았다.      


지성이 졸업 연주회에 시부모님과 함께 가고 싶다. 아직 손자가 피아노 치는 것을 보신 적이 없어서, 이번 아니면 기회가 안 생길 것 같다 군산 본가에서 행사 장소, 광양 가는 차편이 마땅치 않아 좀 번거로워도 우리가 왔다 갔다 하기로 했다. 그런데 하루 전 연락하셔서, 아이들 등교도 그렇고, 출근도 바쁘니 행사 끝나고 목포로 와, 자고 다음 날 버스 타고 가시겠단다. 결혼하고 부모님이 우리 집에 오신 적은 다섯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데 주무시고 가신 것은 딱 한 번이다.      


여자들 모이면 시댁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저마다 괴로운 사정이 있다. 듣기만 하는 나는 마음이 우쭐해진다. 내 시어머니는 언제나 지갑은 활짝 여시고, 생색이나 간섭은 전혀 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좋고 맛난 것은 새끼들 먼저고 본인은 가장 물짠 것 차지다.  좀 무뚝뚝하신 편이나 감정 내비치는 것을 조심하시니 오히려 좋다. 너무 가깝게 오시지도, 그렇다고 멀게도 계시지 않는다. 그 어렵다는 적당히를 아시는 분. 그래도  단 하나 흠이라 하자면, 지나치게 깔끔하신 것. 부모님 댁 현관에 들어서면 여기에 신을 벗어도 될지 고민하게 된다. 여느 집 방보다 깨끗하다. 집 안은 잘 가꾸어 놓은 고급 펜션 같다. 오래된 살림살이라도 주인이 날마다 어루만져 줘 그런지 기품이 있다. 창고 깊숙한 데도 말끔하다. 풀 한 포기 없는 텃밭에는 고추와 가지가 오와 열을 맞춰 달려 있다. 들 일에 집 안까지 이렇게 유지하려면 몸이 굉장히 혹사당한다. 여기서 조금만 내려놓으시면 좋겠다.     


부랴부랴 청소를 시작했다.  잠자리가 꿉꿉하면 잠을 못 주무시니 이불과 배갯잇부터 빨아야지. 엄마가 좋아하는 피죤을 잔뜩 넣어 쉴새 없이 세탁기를 돌렸다. 버릴까 말까 묵혔던 것들을 싹 내놨다. 늘 하시는 말씀. "다 내 쏴라." 창틀을 닦고 현관을 물걸레질해 반짝반짝하게 만들었다. 냉장고와 싱크대 낯짝도 세수시키고 청소기를 구석구석  밀었다. 식탁, 책상, 거실장 밑으로 무슨 먼지가 이렇게 많은지. 돈도 나왔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은 유튜브 청소 박사님을 따라 했다. 영상처럼 되지 않는다. 씻고 나왔더니 머리가 핑 돈다.     

모시고 광양에 왔다. 불고기가 유명하니 이름난 식당으로 갔다. 한우는 2만 5천 원이고 호주산은 1만 9천 원이다. 고민된다. 얼마나 큰 부자 된다고. 사실 함께 외출을 해본 적이 거의 없어, 집 아닌 곳에서 마주 보는 일이 좀 어색하다. 초등학생 딸들이 없었다면 싸늘한 분위가 될 뻔했다. 아빠가 먼저 나가서 계산하셨다. 아, 호주산 먹을걸.   

  

인생에 시부모님과 쇼팽이나 베토벤 음악을 듣는 날이 있을 줄 몰랐다. 재밌다. 어머니 최애 곡은 <여자의 일생>이고 가수는 임영웅이다. 아들은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3번>>을 연주했다. 이 음악은 어떻게 느끼셨나 궁금하다. 나는 댕강 올라간 아들의 바지만 눈에 들어온다. 분명 의사가 성장판 닫혔다고 했는데 키가 또 자랐나 보다. 검정 바지는 작년 것을 그대로 입히고 셔츠만 새로 사줬다. 좀 미안하다.      

목포로 돌아오는 길. 모두 긴장이 풀려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지성이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겁 많고 잘 울던 아이였다. 어머니는 실수하면 어쩌나 긴장해서 몸이  뻣뻣해지더란다. 틀리면 알아나 듣냐고 아버지가 놀리신다. "저 자슥도 나름 애썼겄지 마는 우리 선영이 고생 많이 혔다." 내가 무슨 고생을 했을까? 평생을 논과 밭에서 산 남자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다. 심장이 아프다.     

애써 청소한 것을 알아봐 주시려나 했는데, 무슨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아무 데도 둘러보지 않고 곧장 주무셨다.      


아침이다. 두 분 잘 드시는 소내장탕을 해남에 가 사 놨었다. 새벽 시장 가서 낙지도 데려오고. 이것으로 아침상을 차렸다. 다른 밑반찬은 다 군산에서 가져온 것이다. 후식으로 무화과를 냈다. 사시는 동네엔 이 과일이 없어 입에 맞을까 걱정했는데 맛보시더니 괜찮다고 세 개를 드셨다. 첫차로 가신다고 준비를 서두르신다. 터미널에 와 표를 끊고 시간이 남아, 같이 차를 기다리려는데 빨리 들어가서 쉬라고 다그치신다. 버스 탈 줄 아니, 걱정하지 말라고.      

글이 좀 써질까 싶어 교회로 왔다. 연습장을 펴고 필통에서 볼펜을 꺼냈다. '연주회'라고 첫 단어를 쓰는데 울음이 터졌다. 낙지에 정신 팔려, 아버지 좋아하시는 계란프라이를 깜박했다. 어머니는 기름기를 싫어해 잘 안 하시는 요리라, 내가 꼭 해 드리고 싶었는데. 가란다고 냉큼 뒤돌아 버린 것도 잘못한 일 같다. 부모는 자식을 끝까지 키운다. 나는 착하게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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