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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Dec 15. 2023

고상한

치질

진작에 문제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변비가 잘 왔다. 임신과 출산을 네 번 치르며 화장실 한번 편하게 가는 게 소원이었다. 입덧할 때는 먹지 못해서, 만삭은 말할 것도 없고. 다 제왕절개를 했다. 가른 부위가 터질까봐, 힘을 주기가 곤욕스럽다. 그 세월을 지냈으니 온전했을 리 없다.     


그날은 육탄전 직전에 싸움을 멈췄다. 미련 없이 이혼하게 한 대 때리라고 했더니, 나가버리데. 둘 사이에 일어난 사소한 것까지도 운명이라 여기고 결혼했다. 살아보니 길 가다, 아무나 붙잡고 결혼해도 지지고 볶을 내용은 비슷할 듯. 우리 남편은 아무 여자 하고도 행복했을 것이다. 성격이 그렇다. 그래도 나는 이 사람이라야 한다. 내가 아무리 길길이 날뛰어도 동요하지 않고, 참는다. 진정하라고 꽉 안아준다. 끝엔 얼척 없는 농담으로 나를 해제시킨다. 평생 그런 줄 알고 믿고 까불었다. 착한 사람이 화내면 더 무섭다더니 사실이었다. 속에 저렇게 거친 것을 품고 있었다니. 배신자. 이날, 서로의 바닥을 보았다. 오랫동안 울었다. 어? 아프다. 많이 아프다.     


이따금 통증이 있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아무리 아파도 절대, 병원에 가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의사지만 나도 보지 못한 그곳을 어떻게 보여 주리오? 당해 보니 '아무리 아파도'는 관념일 뿐, 피부로 닿으니 생각이 달라진다.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다. 간간이 신음만 뱉을 수 있다.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고, 혼자 해결해야 하니 아픔이 더하다. 살려면 갈 수밖에. 더구나 지금 이혼도 하게 생긴 마당이다. 더 큰 일이 앞에 있다. 법원에도 가고, 일자리도 구해야 한다. 애들을 키우려면 건강해야지. 아무렴. 아픈 만큼 용기가 생겼다.      

집 근처에 항문외과가 있다. 죽어도 안 갈 데였지만  오다가다 눈여겨봤다. 병원 앞에 왔다. 덜 아픈 것 같다. 집에 갈까? 아니다. 들어가자! 병원 문을 열었다. 웬일? 대기실 의자 빈자리가 없다. 아픈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반갑기까지 하다. 서서 기다리자니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나? 어떤 자세로 의사를 만나는 걸까? 치질을 넘어 중병이면?     


황선영님을 부른다. 의사가 바로 환부만 볼 수 있게 간호사가 먼저 나를 정비한다. 의사가 오더니 들여다본다. 아파서 어떻게 사냐고 묻는다. 다시 옷을 입고 선생님 앞으로 갔다. 인상도 좋고, 목소리도 가볍다.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리며 보라고 한다. "안 볼래요." 모니터를 더 들이민다. 말로만 들었던 내 것을 처음 보았다. 내 몸에 있는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  당장 수술해야 하니 입원하란다. 병세가 올 때까지 왔단다.      

남편에게 전화해? 말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해야겠다. 전화를 걸었다. 받는다. 목이 멘다. 준비했던 말이 안 나온다. 가만히 있으니 말을 하라며 다그친다. 이혼은 무슨 이혼. 보고 싶다. 울음을 참으며 목소리를 내니 헬륨가스 마신 소리가 나온다. 아파 수술해야 하니 빨리 오라고 했다. 놀라는 것 같다.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다. "..."     


관장 하고 속에 이상은 없는지 대장내시경을 했다. 입원실로 올라가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시간을 기다렸다. 병실마다 사람이 꽉 찼다. 다시 한번 위로가 된다. 세상에 나만 겪는 아픔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병실로 남편이 들어온다. 웃지도, 울지도 못해 어정쩡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내가 먼저 웃어줬다. "재밌지?"     

수술실에 들어가 엎드릴 때부터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되뇌었다. 그렇지 않고는 이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다. 정육점 고기가 되어 난도질당하는 꿈을 꾸었다.      


병원에서 이틀 밤을 잤다. 간호사가 힘들면 하루 더 입원하란다. 그러고 싶지만 안 된다. 무조건 가야 한다. 일요일이다. 예배에 남편과 아이들만 가면 교인들이 물을 것이다. 대충 둘러대면 될 터인데, 규칙 지키는 일은 허술해도 거짓말을 못 하는 이 사람은, 아마 두 마디 이상 물어보면 있는 사실을 이야기할 것이다. 꼭 가서 내 자리에 앉아 있어야한다. 동네방네 소문나게 할 수 없다.      


좀 고상한 데가 아프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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