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옹졸 Dec 17. 2023

끓는점

부부싸움

남들은 어떻게 싸우나? 난 별로 속이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자존심도 쉽게 상하고 농담에도 죽자고 달려드는 때가 많다. 신혼 땐 악다구니를 쓰기도 했다. 대부분 저쪽은 아무 반응이 없고 나만 소리 지르고 울고 불고다.  그러니 싸움이 되질 않고 혼자 쑈로 끝났다. 결혼 생활 십 년이 넘어 남편도 화를 표하기 시작했는데 말을 안 하는 것이다. 뭐 자주 있는 일은 아니고 일 년에 한 번쯤? 그러다 최근 몇 년 사이 잦아졌다. 올해도 두 번째다.


남편이 어디쯤에서 끓는지 안다. 적정선만 지키면 좀체 성질내는 법이 없다. 그런데 이건 몰랐던 지점이다. 궁금한 걸 물었을 뿐인데 아주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더 물을 수가 없어 방을 나왔다. 마침 애들이 졸려해 재우다 같이 잠들었다. 아침에 밥을 차려 남편을 부르니 대꾸가 없다. 곧 출근했다.


퇴근했다. 곧장 방으로 간다. 밥을 먹으라고 불렀으나 말이 없다. 따라 들어갈까 하다 냅뒀다. 전에는 상처받는 게 무섭지 않았는데 요샌 겁난다. 지금 말을 섞으면 좋게 오갈 리 없다. 나이 먹었는지 아픈 걸 받아 낼 기운이 없다. 센 걸 한방 먹일 재치도 둔해졌다. 아이들도 저녁 먹기 싫다고 자기들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 혼자 먹었다. 맛있다


퍼뜩 깨니 새벽 한 시다. 남편한테로 갔다. 뒤에서 껴안았다. 반응이 없다. 깊이 자는군. 나도 그대로 잠들었다. 날이 밝은 기운에 몸이 깼다. 내 다리와 이 사람 다리가 엉켜있고 팔이 내 허리를 감싸고 있다. 다행이다. 풀렸나 보다. 다시 잠들었다. 추워서 눈이 떠졌다. 뭐야? 등 돌리고 자기만 꽁꽁 싸매고 있다. 손을 가만 등에 대니 팔로 팍 뿌리친다. 엥? 뒤섞은 몸은 뭐였지? 아, 잠결.


월, 화, 수, 목, 금, 토. 우리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퇴근하면 곧장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고 아무 말하지 않고 출근했다. 아이들은 남편이 깨기 전에 등교한다. 늦게 퇴근하거나 집에 있어도 별 교류가 없을 때가 많으니 아빠가 조용한 것을 특별히 여기지 않는다.


제부는  부부싸움을 해도 집에서 밥을 꼬박꼬박 먹는다고 한다. 동생한테 니네 형부는 안 먹는다고 하니 너무 부럽단다. 밥 안 차려도 되고 얼마나 좋냐면서. 그런가? 수요일쯤 되니 슬슬 걱정된다. 점심은 잘 먹겠지?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건 아니겠지? 먹는 밥이 죄스럽게 느껴진다. 그래도 식욕은 성하다.


주일. 이 사람이 먼저 교회에 갔다. 주보를 나눠주는 봉사를 한다. 아, 어떻게 하지? 본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두 개긴 하나, 한 쪽은 거의 담임 목사님만 출입하는 데다. 뭐 누가 다닌다고 경을 치진 않을 것이나 내가 그 문으로 이용하면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주보를 받고 눈을 마주치면 웃음이 나올 것 같다. 웃는 건 지는 건데. 저쪽에서도 웃어 준다면 문제가 없는데 싸늘한 눈이라면 무너지는 자존심을 어떻게 받아낼까?


계단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한무리가 내리니 왁자지껄하다. 거기에 남편 소리도 섞여 들린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나한테도 저리 상냥하게 말해줄까? 내 눈도 따뜻하게 봐줄까? 궁금하다. 우리는 어떻게 마주하게 될지.


그이가 보인다. 못 보던 양복을 입었다. 아, 몇 해 전에 사고 몸이 불어 얼마 못 입고 모셔둔 것이다. 호리호리해졌다. 얼굴도 홀쭉하니 더 어려뵈고 약간 기운 없어 눈이 깊다. 도대체 얼마나 굶은 거야?


사랑한 20년 거짓말 같다. 스쳐가는 시간이 내가 지어낸 환상인 듯. 우리가 처음으로 간다면, 이 모습 이대로 서로 모르는 사이라면 다시 좋아할까? 나 너무 잘 먹고, 자서 피둥피둥하다. 이번엔 내가 쫓아다닐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고상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