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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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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May 08. 2024

천천히 와

국화


익산에서 새마을호로 갈아타고 대천에서 내렸다.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진다. 카톡이 오는 것 같아 핸드폰을 꺼냈다. 국화다. 지하철역까지 차가 막혀 터미널에 제시간 도착이 어려울 것 같다고. 열한 시 표로 바꾼단다. 두 시간 기다려야 한다. 걱정 말고 천천히 오라고 답을 보냈다. 아무렴. 다 좋다. 일러도 늦어도. 국화니까. 그러고 보면 사람 좋아하는 데 별다른 영문이 있는 것 같지 않다. 몇 시간을 기다리게 해도 이쁘디이쁘니 말이다. 까닭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하고 나서 찾아가는 것인가? 하고많은 사람 중에 얘한테 마음을 주고 싶었다. 나한테 특별히 친절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


잠바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다. 대천역 광장을 나와 걸으니 폭이 넓지 않은 천이 흐른다. 봄이라고 주변 풀과 나무의 초록이 생기 있다. 한참 서서 보았다. 다리가 있길래 건넜다. 무슨 다린가 궁금해 뒤돌았다. '만남교'라고 쓰여 있다. 참 고전적인 이름이고만. 좀 더 걸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카페가 보인다. 그리로 들어갔다. 비 오는 날 오전. 손님이 나뿐이다. 허브차와 크루아상을 시켰다. 창가로 자리를 잡아 앉았다. 카톡 진동이 울린다. 이번엔 지하철을 잘못 탔다는 내용이다. '센트럴시티'로 검색해야 하는데 '센트럴'만 넣었더니 송도로 가는 '센트럴파크'가 제일 위에 떴나 보다. 엉뚱한 방향으로 가다 내렸단다. 열한 시 반 버스로 또 미뤘다며 미안하다고 한다. 귀여운 여자 아이가 하트를 들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꼭 저를 닮았다.     


종일 기다려도 괜찮아. 니 생각 많이 할 수 있으니까.


주문한 게 나왔다. 빵을 손으로 크게 떼어 입에 넣었다. 맛있다. 차는 약간 씁쓸하니 고소한 빵과 잘 어울린다. 보던 소설을 꺼내 들었다. 국화 오기 전에 다 읽게 될 것 같다. 역시 책은 두 권씩 가지고 다녀야 한다. 재미, 있는 것 없는 것으로. 아줌마가 됐어도 남 연애 얘기 왜 이렇게 재밌는지 모르겠다. 눈 깜짝할 새 읽어 버렸다. 차를 마시다, 밖을 보다, 결국엔 핸드폰을 한다. 요즘 '릴스'에 빠졌다. 별 의미도 없는 걸 넋 놓고 본다. 잠깐인 것 같은데 시간이 훌쩍 지나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정신 차려야지, 이러다 더 멍청해질 것 같다. 정지우 작가의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펼쳤다. 작가야말로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열두 시 전엔 드문드문 테이크아웃해 가는 손님만 있었는데 좀 지나니 무더기로 들어온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셋, 주문하는 소리가 시끄럽다. 음료를 받아 테이블에 놓는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자마자 셋이 동시에 핸드폰을 들고 주문한 걸 여러 각도로 찍는다. 까만 티를 입은 이가 먼저 전화기를 손에서 놓았다. 빨대로 음료를 휘휘 젓는다. 잔을 테이블에 둔 채 고개를 숙여 입술을 빨대에 댄다. 웃는다. 머리카락이 똥꼬까지 긴 학생은 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마지막 사람은 잔이 뜨거운지 조심스럽게 들었다, 놨다만 한다. 똑같은 크록스 신발을 신은 남자와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테이블에 가 앉고 남자는 주문을 한다. 끝내고 여자 옆으로 가 딱 붙어 앉는다. 서로 손깍지를 낀다. 내 바로 앞으로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 앉았다. 왼쪽에 회사 이름이 새겨진 같은 비둘기색 잠바를 입었다.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말랐다. 분홍 마스크를 썼다. 반대편은 똥똥하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빨고 말을 시작한다. "우리 관리자 신랑 죽었잖혀. 그 여자 신랑 있을 때부터 남자 있었다는디." 와우, 흥미진진한데. 온 신경을 귀로 모았다. 아, 그런데 음악이 바뀌더니 소리가 커졌다. 신나는 팝송이다. 카페 안 사람들도 목소릴 높인다. 잘 안 들린다. 아쉽다. 분홍 마스크는 한 마디도 안 할 작정인지 음료를 앞에 두고도 벗지 않는다. 화장기 없는 얼굴. 분홍 마스크가 기미를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한참을 듣기만 하다 살짝 내리더니 원샷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내 노란 연습장을 폈다. 이야기를 더 상상했다. 신랑 죽기 전에 있었다는 남자는 애인? 그렇다면 남편은 왜 죽었을까? 지병? 살인이나 자살일지도 몰라. 에고,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가. 애인이 있는 여자는 죽은 남편 장례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 울까, 웃을까? 세상에 궁금한 게 많다.     


테이블 위 전화기 진동 소리가 요란하다. '선영아, 나 곧 내려.' 시간을 보니 한 시가 훌쩍 넘었다. 책과 연습장과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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