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국화. 화려하기도 어찌 보면 소박하기도. 내 친구 국화처럼. 동그란 눈이 매력인 예쁜 얼굴, 깨끗한 피부, 검고 풍성한 머리칼. 170cm이나 되는 키에 허리가 한 줌밖에 안 된다. 겉이 이러면 성격은 좀 나빠도 되거늘, 지구인을 다 품을 듯 넉넉하고 따뜻하다. 주변에 사람이 많다. 거기에 모범생이라 늘 앞자리에 앉아, 강의실 뒷문 근처에 있는 나랑은 별로 가까울 일이 없었다. 그러다 비슷한 때에 결혼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애를 낳았다. 걔는 셋. 나는 넷. 대부분 그렇듯 녹록지 않은 결혼 생활은 우릴 친구로 만들었다.
“선영아. 예랑이가, 우리 예랑이가 혈액암이래.” 아... 이게 실제 있는 병이구나. 드라마 주인공만 걸리는 줄 알았다. 얼마나 아플지 알 수 없어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행히 눈물이 나왔다. 너무 어이가 없을 땐 웃음이 나올 때가 있기에. 한참을 말없이 전화기만 붙잡고 있었다. 국화가 울먹이며 한 마디하고 끊었다. “기도해 줘.”
우리는 사이좋게 형편이 좋지 않았다. 국화는 남편이 꿈을 찾아 이직했고 우린 실직했다. 네이버에 '백혈병 치료비'를 쳤다. 아, 하나님. 부탁 때문이 아니라 기도가 절로 나왔다. 돈을 주고 싶은데 없다. 몇 달 백수생활 하느라 가진 걸 다 썼다. 현금서비스라도 받으려니 한도가 간당간당하다. 계좌를 털어 모으니 30만 원이다. 서울까지 차비가 10만 원. 가지 말고 계좌로 보내야겠다. 구석에서 질질 짜는 나한테로 남편이 오더니 다녀오란다. 눈이라도 잠깐 마주치라고. 하얀 봉투에 20만 원을 넣었다. 겉면에 무슨 말을 쓸까 하고 볼펜을 들었다. 다 쓸데없는 소리 같아 그냥 내려놓았다. 강남성모병원 21층. 폐쇄 병동이라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아주 크고 깨끗한 통유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서 전화로 대화해야 했다. “밥 잘 먹고 있어. 나 갈게.” 돌아서니 국화 신랑이 헐레벌떡 달려온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게 해서 미안하다고 인사한다. 나는 얇은 봉투를 부끄럽게 내밀고 차 시간을 핑계 대며 얼른 엘리베이터를 잡아 탔다. 저게 무슨 도움이 되려나. 미안하다.
두어 해가 지나고야 만났다. 골수 이식받고 지내다 재발돼 다시 항암치료를 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났을지. 내가 알 수 없는 세상을 살다 온 친구. 예랑이는 힘든 치료를 견뎠고 우리는 직장을 찾았다. 여름 휴가비와 보너스 받은 돈을 국화 핸드백에 몰래 넣었다. 봉투에 이렇게 썼다. ‘예랑이 소고기 사 줘.’
그리고 다섯 해가 흘렀다. 아이들한테서 좀 자유로워진 우리는 전보다 자주 본다. 밥이며 차며 꼭 자기가 산다고 한다. “니가 나 백만 원도 주고, 전화하자마자 서울까지 왔잖아.” 얘한테 얻어먹은 게 백이십만 원의 두세 배쯤 될 것이다. 국화야, 이제 그 말 그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