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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Aug 26. 2024

돌아올 탕자

도망

하는 말이 다 맞다. 맞는 말. 맞는 말은 사람을 기죽게 한다. 아프다.


주일 학교 여름 수련회가 다가온다. 남편과 아이들이 떠나면 1박 2일 나만 집에 남게 된다. 괜히 웃음이 나고 식구들에게 냥한 목소리가 나왔다. '하나님, 이런 자유의 날을 어떻게 보내면 좋겠습니까?' 만만한 게 국화라 연락을 해 볼까 했는데 지난번에 바쁘다고 했었던 것 같아 냅두었다. 두 엘에게 연락할까 하다, 너무 들이대는 것 같아 참았다. 혼자 떠나는 걸 여러 각도로 상상해 보았으나 어째 영 그림이 좋게 안 나온다. 그냥 집에 있어야겠다. 누워 주구장창 핸드폰을 하고 밤늦게 라면을 끓여야지. 그래, 이게 재밌겠다.


날이 되었다. 남편과 딸들이 아침 여덟 시쯤 집에서 나갔다. 나도 출근을 서둘렀다. 중3 둘째에게 짐 잘 챙겨 다녀오라고 웃으며 인사했다.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알았다는 대답을 듣고 집을 나섰다. 아들은 가기 싫다고 의견을 계속 주장했는데 타협의 여지가 없는 일이라 우리 부부는 받아주지 않았다.


"자, 이제 대표 받침 'ㅁ' 배울 거예요. 무슨 소리가 나는지 잘 들어 봐요. 미음은 '음' 소리가 나요. 오, 여러분 성에 다 미음이 들어있네. '김'은 '기이임', '임'은 '이이임' 어때, 쉽죠?" '감'을 써 주고 읽어 보게 하려는데 핸드폰 진동이 멈추지 않고 요란하게 울린다. 누군지 슬쩍 확인했다. 남편, 큰딸, 작은딸, 박 집사님, 김 집사님 전화가 찍혀있고 카톡도 여러 통 들어와 있다. 아이들과 미음이 들어간 여러 낱말을 쓰고 읽었다. 계속 시계를 쳐다보다 쉬는 시간을 기다렸다. 아홉 시 40분. 카톡부터 확인했다. '지명이 연락 왔어?', '엄마, 작은오빠 왜 안 와?" '사모님, 지명이 연락이 안 됩니다.' '기다리다 먼저 출발합니다."


퇴근하고 바로 지명이한테 전화했다. 꺼져있다. 카톡을 남겼다. '더운데 집으로 와. 엄마 괜찮아.' 제 형 연락은 받을 것 같아 큰애한테도 계속 전화해 보라고 시켰다. 20분쯤 지나 큰놈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 지명이 터미널 피시방에 있대. 집으로 온다고 했으니 걱정 마세요."


아들이 집에 들어왔다. 한나절만에 가출이 끝났다. 볕에 얼굴이 익어 빨갛고 어깨가 풀썩 주저앉았다. 씻으라고 했다. 샤워하는 동안 밥상을 차렸다. 요즘  반찬 맘에 안 들다고 밥상에 앉지도 않는데 오늘은 순순히 자리에 앉아 밥 한 그릇을 먹는다. 먹는 걸 빤히 쳐다봤다. "나 예수님 안 믿어요. 그래서 수련회 안 간 거예요. 종교를 강요하지 마세요." 맞는 말이라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래, 강요할 순 없어.


아. 언제고 이런 날이 올까 봐 무서웠다. 가끔 나도 내가 믿는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지, 수만 번, 수억 번 의심했다. 이런 끊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믿음으로 어떻게 자식을 믿게 키울 수 있을까? 방법은 진짜 하나님을 믿고 그 앞에 무릎 꿇는 수밖에 없었다. 강요라니. 당치않다. 세상에 그렇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라고. 부지런히 가르쳐야 하지만 나한테 달려있는 일이 아니다. 아이는 강요로 느꼈다니 미안하다.


지명이는 내내 잠을 잤고 나는 옆에 누웠다. 나도 하나님을 피해 여러 번 도망갔던 일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나를 닮은 게군. 이렇게 1박 2일이 다. 핸드폰도 라면도 기쁨이 되지 않았다.


수련회 갔던 남편이 돌아왔다. 지명이는 벌로 종아리 열 대를 맞았다. 예수님 안 믿는 부모가 벌을 내릴 순 없지만 어른들을 속이고 여러 사람 걱정시킨 건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게임 한 달 안 하기와 종아리 열 대 맞기 중에 후자를 택했다. 수련회 안 가고 가출했다는 소식이 온 동네에 전해졌고 여러 사람이 날 위로했다. "사모님, 걱정 마세요. 저런 애들이 나중에 신학한답니다. 호호호." 나도 같이 웃기는 했으나 곧장 기도했다. '하나님, 목사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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