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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Sep 25. 2024

교수님의 쓰라 해서 쓰는 우리의 밤

룻과 이무진

 

<8월의 대답> 초고는 '밤'과 '콩물'의 분량이 비슷했다. 그런데 밤이라는 게 그렇잖는가, 젊고 건강해서 서로 사랑하는 남녀에겐 일이 많은 시간이다. 좀 선정적인 것 같아 다 지우고 '엉킨 다리'만 살렸다. 그냥 그대로 둘 걸 그랬다. 그랬다면 교수님께 칭찬받았을 텐데. 그런데 참,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 밤 얘기를 더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명절을 앞두고 감정이 상하는 일이 생겼고 그 채로 글을 쓰니 이건 또 너무 폭력적이라 마음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진정되니 마감 하루 전이구나. 이무진 가수를 아는지 모르겠다. <과제곡>이라고 그가 대학 때 대충 만들었다는 노래인데 경쾌하고 가사가 되게 재밌다. 교수님이 과제를 많이 내줘서 힘들다고 어리광을 부리는 내용이다. 나도 교수님이 밤의 분량을 늘이라고 하지 않았다면 이 남자를 더 사랑해야 하는 고통은 겪지 않았을 텐데.


 

아무튼 우리의 밤은 이렇다.


 

"자기야, 자기야! 이리 와 봐." 나를 부르는 소리가 크고 다급하다. 퉁퉁한 엉덩이를 간신히 일으켜 남편 있는 방으로 갔다. 문을 여니 대뜸 "자자, 누워."라고 한다. 콧소리를 조금 섞어 나직이 "왜, 뭐 하려고?"라고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해. 너무 졸려서. 옆에 만 있어." 흥, 죽부인이 필요하단 말이군. "나 빨래도 개야 하고 설거지도 다 못 했어. 낼 아침에 자기가 할 거야?" 눈과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내젓는다. 나쁜 사람 같으니라고. '자자.'라는 소리가 싫지 않지만 그래도 쉽게 누울 수야 없지. 해 줄 것도 아니면서 사람 귀찮게 오라 가라 하냐며 한바탕 퍼부어 주고는 방을 나왔다. 부엌을 마저 정리하고 빨래를 개어 제자리에 넣었다. 아이들도 늦더위에 학교 다니는 일이 고된지 일찍 잠들었다. 책과 작은 무선 스탠드를 손에 챙겨 들고 거실등을 껐다.

 

남편한테로 가니 이미 곯아떨어졌다. 결혼하고 몇 해는 붙어 자면 피곤했다. 극성스러운 때가 지나서는 서로의 몸뚱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숙면을 못했다. 세월이 좀 더 지난 지금은 옆에 있으나 없으나 상관이 없다. 이이 발치에 낮고 긴 탁자가 있다. 스탠드를 켰다. 가장 낮은 조도로 맞추고 행감 치고 앉아 책을 펼쳤다. 폴 밀러의 <사랑하다, 살아가다>이다. 깊이 사랑하고 싶을 때나 다 내던져 버리고 싶을 때 읽는다. 성경 <룻기>의 룻과 나오미, 보아스 그리고 하나님 이야기인데 순종, 인내, 헌신 같은 아주 고리타분한 걸 알려준다. 자기 보호나 연민이 익숙한 세상에서 이런 게 유용할까 싶지만 요동치는 감정을 가라앉히기엔 딱 좋다. 발을 잡아당겨 내 허벅지 위로 올렸다. 남편 몸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 각질 하나 없이 매끈한 뒤꿈치가 아기처럼 분홍색이다. 부부는 한몸이라지. 이렇게 하얗고 부드러운 게 내 것이라니. 고개를 숙여 코를 가까이 댔다. 아무 냄새가 없다. 그렇다고 발만 가질 순 없고 털북숭이 다리, 올챙이 배, 좁쌀 여드름 가득한 등까지 모두 가져야 비로소 온전히 내 것이 된다. 산 채로 한몸이 되는 건 고통스럽다. 누구 하나는 죽어야 일이 쉬운데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나. 내 안에 살인충동이 있다는 걸 결혼하고 알았다. 결혼 생활의 사건 사고를 감정대로 처리했더라면 둘 중 하나는 진작에 저 세상 사람일 테지. <룻기>를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다리털을 쓰다듬었다. 피부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했는데 이젠 살이 드러났다. 뚱뚱한 배를 살살 문지르다, 어쩌나 보려고 배꼽에 손가락을 넣었다. 그래도 모르고 잔다. 등거리를 살살 긁어 주다, 스탠드를 끄고 나도 누웠다. 5, 4, 3, 2, 1. 눈도 안 떴고 자는 게 분명한데 난 줄 어떻게 아는지 몸을 돌려 다리 한쪽을 척 올리고 손을 더듬더듬, 내 몸에서 무얼 찾는다. 아마 온통 살덩어리라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게 만지고 싶은 모양이다. 헤매는 손을 잡아 거기에 놓았다. 찬물로 설거지를 오래 했더니 배가 차가워 살살 아팠는데 따뜻한 손이 닿으니 이내 가라앉는다. 잠이 달다. 새벽 다섯 시 30분. 그이가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다. 엉킨 다리를 풀고 휴대폰 알람을 끈다. 그리고 돌아누워 있는 내 목 밑으로 팔을 깊숙이 넣고는 꽉 안는다. 뽀뽀까지 해 주려나 기대했는데 그냥 일어나 옷을 입는다.

 

밤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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