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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국화

에프(F)에게 가는 날

by 황옹졸

종이돈이 생길 때마다 차곡차곡 모아 30만 원을 만들었다. 국화한테 다녀오려고 한다. 이사도 했다 하고 권사 취임도 앞뒀다. 40대 초반의 파릇한 권사님이라니. 나이 지긋하고 몸매와 인품이 풍덩한 흔히 생각하는 이미지와 차이가 있지만 이 친구가 누구보다 하나님을 섬기고 바라는 마음은 어느 교회 성도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걸 내가 안다.


주일 아침 예배 준비를 하고 국화한테 갈 짐도 미리 꾸렸다. 난 비상금을 안 입는 잠바 주머니에 넣어 둔다. 그 30만 원도 거기 있다. 20만 원은 봉투에 담고 나머지는 오며 가며 쓸 것이다. 돈을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없다. 왼쪽, 오른쪽을 다 뒤지고 모든 옷의 주머니 주머니란 다 찾아보았다. 그래도 안 나온다. 가방과 지갑을 쏟고 농을 다 뒤집어엎었더니 예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포기하고 옷을 입었다. 생각했다. '어디로 갔을까, 어떻게 할까?'


엠비티아이(MBTI) 검사했다고 비장하고 들뜬 목소리를 말했다. "선영아, 나 '티(T)'가 '영(0)'이래. 머리는 없고 가슴만 있다는데." 엠비티아이가 일리가 있긴 한 것 같아 한참 웃음이 났다. 나는 아이엔티제이(INTJ)인데 남한테는 티(T), 나한테는 에프(F)를 적용하는 아주 이기적인 인간이다. 이런 나를 따뜻한 가슴이 머리에 있는 국화가 품어 주었기에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얘는 거친 면이 전혀 없다. 정희랑 나는 만나기만 하면 니가 맞네, 내가 맞네를 외치며 싸우기 일쑨데 국화는 우리 둘을 이해할 수 있다며 따뜻한 손으로 우리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아 준다. "친하게 지내렴." 하나님은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없으신 것 같다. 내 생각엔 나 말고 국화 같은 사람이 목사 마누라, '사모'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그 누구라도 사랑으로 품어 교회가 든든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무겁고 복잡한 머리를 가지고 교회에 갔다. 예배 시간 내내 잃어버린 30만 원을 생각했다. 어디로 갔을까. 돈을 세어 보려고 딱 한 번 주머니에서 꺼낸 적이 있다. 그때 잘못되었을까. 다른 데서 30만 원을 헐어 쓸 여유는 없다. 지난주부터 백수가 되었기에. 그냥 사정이 생겼다고 못 간다고 할까, 아니면 무리하게 돈을 헐까, 그냥 빈손으로 가서 놀고만 올까. 세 가지를 놓고 어느 게 유익일지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당일에 와서 약속을 취소하는 건 명예를 중시하는 나에게 큰 오점이다. 돈을 다른 데 당겨 쓰면 다음 달이 너무 힘들어진다. 그리고 명절도 끼었지 않은가. 국화는 지금 내가 온다고 이것저것 먹을 것을 사대고 있을 것이다. 얻어 만 먹고 뒤돌아서도 암시랑도 않을 국화지만 나의 뒤통수가 너무 따가울 것 같다. 난 주변 사람에게 좀 인색한 편인데 국화한테 만은 안 그렇고 싶다. 받는 것보다 내가 주는 게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그냥 그러고 싶다.



목사님이 축도를 했다. 나는 결심했다. '하나님, 형편대로 하겠습니다. 우린 그래도 되는 사이니까요. 나중에 더 많이 줄 때를 허락해 주세요.'


예배 마치고 돌아와 아이들 먹을 것을 챙겨 주었다. 두어 밤 집을 비울 거라 엄마 없는 동안 잘하라고 몇 가지 잔소리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차에서 읽을 책을 고르려고 책장을 살폈다. 안수현의 <그 청년 바보 의사>라는 책이 눈에 들어온다. 아주 오래전에 읽으며 끝도 없이 눈물을 쏟았었는데 다시 읽고픈 마음이 올라온다. 검지 하나로 책을 당겼다. 여러 명의 신사임당이 투두둑 떨어진다. 어머머. 이 무슨 일? 이게 왜 여기에서 나오나?

내 돈 맞겠지?봉투에 가지런히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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