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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국화

국화에게

2024년 12월 5일

by 황옹졸


자잘한 일이 널렸는데 손에 잡히지 않아. 날마다 너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었거든. 그것들이 잔뜩 쌓여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됐다. 너랑 언제 연락했나 전화기를 확인하니 통화는 9월이 마지막이고 카톡은 지난달이 끝이구나.



어떻게 지냈어? 너의 허리 안부가 제일 궁금하고 다음으로 예랑이가 아프지 않고 학교에 잘 다니는지, 김정현 씨는 회사에 힘들지 않은지, 사랑이 의현이 사춘기는 잘 넘어가고 있는지. 이렇게가 차례야. 바쁘지? 요즘 김장철인 지 여자들 모이면 김치 얘기가 빠지지 않더라. 김장하러 전주에 오니? 우리는 오늘부터 김장인데 나는 못 가. 아버지,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실 것 같아. 오지 말라고는 하는데 너무 죄송하더라. 우리 시부모님의 가장 좋은 점은 나를 착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거야. 내 안에 있는 선한 걸 사용하게 해 주셔서 감사해.



국화야, 참 바빴어. 태어나서 이렇게 분주하게 산 적이 없었는데. 예배하고 일하고 글 쓰고 놀고 살림하고 책도 읽고. 교회를 섬기고 가정을 챙기는 것도 벅차서 다른 건 생각하지 않고 살았는데 요즘은 나 자신이 전혀 다른 내가 된 것 같아. 예배 시간엔 피곤해 졸기도 하고 글 실력은 늘지 않고 더 난잡해지며 살림에 시간을 쏟을 수 없어서 식구들 먹는 게 부실하고 집은 너무 더럽지만, 그냥 그렇게 살아. 이 시간을 즐기며. 거울을 보는데 눈가 기미와 주름이 장난 아닌 거야. 언제 이렇게 늙었을까. 나에게 시간이 한정 없는 게 아니라는 게 피부로 실감돼. 그렇지, 여전히 세상은 무섭고 겁나고 실수하는 건 너무 쪽팔리고 돈을 벌어도 빚만 느는 현실은 그대로지만 그냥, 즐겁게 살고 싶어. 그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은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사실 지난달에 이력서를 두 군데나 넣고, 다 떨어지는 경험을 하였단다. 하하. 꼭 되고 싶었거든. 웃기는 일이 뭔 줄 아니? 여태 돈 안 벌고 살았으면서, 돈 버는 내가 상상조차 안 되었는데 지금은 반대라는 사실. 한 곳은 면접까지 보러 갔는데 안 되었고 다른 덴 경쟁률이 너무 높아서 서류에서 탈락하고. 자기 소개서 쓰는 것에 진을 다 빼고 면접 준비로 며칠을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면접장에선 너무 긴장해 머릿속이 하얘져 준비한 걸 다 까먹고. 합격일지 탈락일지 조마조마한 마음을 진정하지 못해 괴롭고 말이야. 공지에 내 이름이 없는 허탈하고 초라한 마음을 추스르며 한 달을 보냈어. 울고 웃으며 내 안에 오래묵어 있던 무언가를 보내버린 느낌이 든달까. 아무튼 그래. 뭔가 좀 더 가벼워 지고 쑥 자란 느낌. 실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기분이 들어. 다음 달이면 지금 하는 일이 끝나니 다시 예전으로 전의 나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 르지만 말이야. 기도해 줘, 국화야. 어쩌면 내가 가진 모든 초라한 것들이 하 나님 주신 가장 좋은 것들일지도 모르겠다. 아직 다 인정할 수는 없지만.


이번 달 바쁘니? 시간 된다면 잠깐이라도 얼굴 보고 싶다.

간절히.


선영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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