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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국화

봄을 맞는 일

국화에게

by 황옹졸

춥다. 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줄 듯 말 듯, 올 듯 말 듯 애태우는 성정이 싫고 싹이 트고 꽃이 피는 게 작년보다 무엇 하나 나아진 것도 없는 일상인데 희망을 갖고 다시 시작해 보라고 강요하는 것 같잖아.


생일 잘 지냈니, 아픈 데 없고? 아이들 새 학기 챙기느라 바빴겠다. 우리의 아들 의현이 지명이가 고등학생이 되었구나. 무슨 시간이 이렇게 빠른지 모르겠어. 돌아보면 모든 건 찰나, 바람처럼 지나가는 일이었던 같아. 지겹다고, 힘들어 못 살겠다고 말했던 것이 후회돼. 끝까지 머무는 건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야. 가난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누릴 것은 풍부했는데 그 시절엔 왜 몰랐을까. 깨달았으니 오늘 하루를 더 낫게 살 수 있는가를 반문하면 또 그렇지도 못하지.



어제 자려고 자리에 누웠는데 지명이가 옆으로 오더니 잠이 안 온대. 왜 그러냐고 물으니 너무 무섭다는 거야. 개학하자마자 야간 자율학습을 시작했어. 너무 힘이 들어서 앞으로 3년을 어떻게 지낼지 겁이 나나 봐. 그러면서 앞으로 고등학교 생활도 그렇고 후의 삶도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어 불안하다고 말하더라고. 무엇을 해서 먹고살아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나 봐. 자기는 결혼은 안 해도 좋고 해고 걱정 없는 직장과 방 투 칸 집만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종교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었는데 지금은 그 심정이 이해가 된대. 하나님이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가길 원하실까 한참 머리를 굴렸어. 아가라면 무릎에 앉혀 꼭 안고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을 텐데. 괜찮다고 하나님이 계시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이야. 그땐 그 말을 하는 나도 듣는 사람이 되어 그가 계신 걸 다시 상기하고 위안 삼아 잠을 청할 수 있었는데. 머리 커진 고등학생한테는 좀 더 그럴듯한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 지명이가 느끼는 게 지금 나한테도 생생 현실이고 인생은 정말 그런 거니까.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고 보장된 것이 없으며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늘 막막하잖아. “아들, 돌아보니 엄마는 무리하며 살았던 것 같아. 결혼할 처지도 아니었는데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사랑을 해버렸고 아이를 키울 만한 금전적 여유가 있길 했나, 사람을 길러낼 만한 성숙한 인격이었나. 와중에 자식을 넷이나 낳았어. 거기서 발생한 여러 부수적인 일을 어떻게 감당했나 싶어. 방법이 없다, 지명아. 예수님을 믿는 수밖에. 그렇게 하고 끌리는 삶을 살아.” 공부를 좀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입에서는 왜 그 말이 안 떨어지는지 모르겠다. 그래, 양심. 하하.




송 목사님이 아파. 폐가 문제인지 심장이 문제인지. 갑상선에 이상이 있어도 그럴 수 있다고 하고. 해야 할 검사를 다했는데 다 정상이래.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병이야. 세상 공기가 자기 코에만 안 들어온다고 해. 수요예배 시작 10분 전에 강단에 섰는데 갑자기 넥타이를 풀어 젖히더니 성큼성큼 나가버렸어. 찬송가 몇 곡이 끝나고 들어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마치기는 했는데. 그날 말씀에 사울이 스스로 깨달아서 바울이 된 것이 아니라고 하시더라. 나도 배워도 잘 알고 있어.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라는 걸. 그러나 아직 한 번도 전신으로 체득한 적은 없어. 아직도 내 힘을 너무 많이 쓰다, 제풀에 꺾여 나가떨어지기 일쑤야. 앉아 있기가 괴로워서 어떻게 예배를 드렸나 모르겠어. 넥타이를 손으로 잡아 뜯을 때 그 사람의 일그러진 표정이 지금도 생생해. 얼굴에 가득 찬 고통. 내가 저 사람을 너무 힘들게 했어.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더 빨리, 열심히 뛰라고 얼마나 채찍을 휘둘렀게. 전신을 매달려 의지하고 있으면서 한 번이라도 믿고 존중해 준 적이 있었나? 이해가 되니? 우리가 스무 살 적부터 알던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렸다는 게. 너무 어울리지 않잖아. 속 좋고 넓기로 정평이 난 사람 아니니. 옆에 폭탄이 떨어져도 일상 그대로 평화롭게 지낼 위인이잖아. 감당할 수 있는 스트레스의 임계점을 넘어서면 몸이 조절을 할 수 없대. 이 사람 하는 말은 언제나, ‘괜찮아, 괜찮지, 괜찮은 것 같아.’ 뭘 물어봐도 똑같은 소리. 하나님은 그렇게 못 믿으면 이 말은 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잘 돕는 자가 되고 싶었는데 방향을 잃어버렸어. 어디로 가야 할지 무섭다. 기도해 줘. 국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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