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국화

거리에서 채운 것

여정

by 황옹졸


겨우 표를 끊었다. 중간에 서서 가야 하지만 그 정도쯤이야.




혼자 나서는 길은 긴장되면서도 설렌다.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일은 지방 사람한텐 심장이 콩닥이는 연례행사지만 300km가 넘게 나의 몸뚱이를 옮기며 비로소 내가 자유인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마음대로 보고 마음껏 상상한다. 이르게 깬 탓에 자리에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한참을 잠들어 있었다. 기차가 서고 문이 여닫히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옅은 베이지 색 바지에 카라가 있는 검정 니트를 입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와 눈이 순간 마주쳤다. 옆자리 주인인 것 같다. 머리카락은 잘 빗어 넘겨졌고 면바지도 구김 없이 다려졌으며 너무 깨끗해 빛이 나는 검정은 그의 흰 살결을 더욱 희게 보이게 했다. 핸드폰과 선반의 번호를 번갈아 보며 좌석을 확인하더니 앞에 선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다. 일어나 비켜 주어야 안전하게 창가로 들어가 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이 덜 깬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몸을 힘껏 당겨 바짝 의자에 붙이고 다리를 오므렸다. 남자가 꽃게처럼 옆으로 걸어 들어온다. 남자는 어깨뿐 아니라 엉덩이도 넓었고 하마터면 펀펀한 엉덩이가 내 얼굴에 스칠 뻔했다. 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횟 돌렸다. 그는 숨을 한 번 내쉬고 앉더니 쓰고 있던 모자를 정중히 벗어 창과 창 사이에 있는 고리에 걸었다. 수없이 기차를 탔지만 거기에 고리가 있는 줄 몰랐다. 가방에서 500ml '동원 보성 홍차 아이스티' 두 병을 꺼내 의자에 붙어 있는 그물망에 넣었다. 만지작만지막 높이를 맞춘다. 나란히 세워진 '보성 홍차 아이스티는'는 꼭 똑같이 솟은 쌍둥이 빌딩 같다. 다음으로 노트북을 꺼내 탁자에 놓고는 가방의 각을 맞춘다. 가방은 거의 잘생긴 박스처럼 반듯해졌다. 그걸 무릎에 놓더니 접이식 탁자를 정리하고 노트북을 가방에 올리고 천천히 위로 올려 정중하게 열었다. 이미 잘 빗어 넘겨진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쓰다듬고 손을 비빈다. 이 모든 과정이 본인의 몸과 물건을 몹시 사랑하여 치르는 의식 같다.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예의를 갖추는 사람을 흔히 보지 못한 것 같다. 나를 사랑하지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색했는데 배울 만한 광경이었다.


마지막 역에서 사람들이 무더기로 내렸고 방향을 정할 필요도 없이 인파가 흐르는 데로 몸을 두면 됐다. 경의중앙선을 타야 해서 고개를 열심히 돌렸다. "자기야, 더더, 입술을 더 올려야지." 바짝 붙은 그들의 몸은 키스를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보다, 군중 안에서 하는 행위가 더 은밀하고 내밀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 것 외에 실제로 키스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으므로 궁금하여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남자는 키가 컸고 여자는 남자를 올려 보고 있다. "에이, 내가 해 줄게." 여자가 팔을 뻗어 남자의 오른쪽 윗입술을 높이 올려 벌린다. 남자는 뻐드렁니였다. 까치발을 하고서 얼굴을 들이대니 코와 입술이 가까이 붙었다. 그리고는 눈을 희번덕이며 손톱으로 이와 이 사이에 깊이 박힌 걸 빼내려고 애쓴다. 나는 가방을 만지작 거렸다. 안에 치실이 있다. 그러나 나의 친절한 마음씨가 저들의 사랑에는 방해가 될 듯하여 경의중앙선 이정표를 찾아 멈췄던 걸음을 떼었다. 그 사이에 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깨나 고춧가루? 아니면 보푸라기처럼 볼품없이 오그라든 부추 가닥쯤. 고소함의 극치를 달리는 깨도 빨강의 정수 고춧가루도 초록과 힘의 상징 부추도 그 있어야 할 자리에선 빛이 나지만 경로를 이탈하여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치아 사이에 자리를 잡으면 흉물이 된다. 이런 흉을 내 보이고 당당히 마주하는 사이는 자릿한 키스를 나누는 연인보다 더 농밀하다.


무사히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탔다. 1번 출구로 나오라는 카톡을 확인하고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가늘고 경쾌한 여자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른다.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틀어 빠르게 걸었다. 나의 친구, 팔을 벌려 그의 가느다란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걸었다. 하룻밤을 지내며 우리는 먹기를 멈추지 않았고 쉬지 않고 말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적당히 아쉬울 때 헤어지기 위해, 어제 만났던 1번 출구 위에 다시 섰다. 눈을 길게 맞추고 등을 쓰다듬는다. 같이 내려가려는 걸 말리며 어서 들어가라고 손짓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어깨와 등이 햇살을 받는 것처럼 쭈뼛하고 조금 간지럽다. 어쩌면 친구가 가지 않고 날 내리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빛을 확인하러 뒤로 돌아볼까 말까 고민을 한 채 계단을 다 내려와 버렸다.


집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한참을 잠에 빠졌다. 일어나 오랫동안 창 밖을 보았다. 산, 논, 논, 산이 반복되는 풍경이다. 가방에서 읽던 책을 꺼내 책장을 넘겼다. 손바닥만 한 분홍 편지 봉투가 무릎으로 툭 떨어진다. 친구의 손글씨다. 그의 성격처럼 귀여우면서 단정하다. '오고 가는 긴 여정에서 너는 무슨 마음, 어떤 생각을 채워갈지......'라고 물어본다. 쓸모없을 것 같은 하찮은 나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물어보는 이 여자를 어찌하면 좋을까.




이번 여정의 길에서 나와 너를 사랑하는 방법을 채웠다고 답해야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봄을 맞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