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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II

그 남자의 쇼핑

by 황옹졸

삼시 세 끼를 해내고 청소 빨래 설거지에 치여 사는 일상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나는 무언가로부터 놓여나 훨훨 나는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꼈다. 교도소에 다녀와 보진 않았지만 출소하면 이 기분일지 모르겠다. 이런 홀가분한 가벼움은 생전처음인가? 그래, 그렇겠다. 20년을 붙어있었으니. 사랑한다고 수없이 외치던 그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도 나를 화나게 하지 않아 평안한 나날을 보냈다.


그이가 없는 열흘간 밥이 더 맛있고 잠도 아주 푹 잤다. 서너 번 전화가 와 태국 망고를 많이 먹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이들이 아빠 전화를 바꿔 받아, 보고 싶다는 인사치레 말을 하고는 선물 많이 사 오라는 코맹맹이 소리를 낸다. 옆에서 듣던 나는 아무것도 사 오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돌아오는 날 면세점 앞이라며 필요한 것 있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말하려다 선크림 세일 하는 것 있으면 사 오라고 했다. 겨울에도 선크림을 바르냐고 한다. 나는 웃었다. 얼굴에 스킨로션도 바르지 않는 사람의 질문다웠다.


식탁에 올려둔 전화기 진동 소리가 요란한다. 화면에 '사랑'이라고 뜬다. 결혼하고 휴대전화에 이 사람을 '사랑'이라고 저장했다. 사랑했고 계속 사랑해야 만한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내가 하는 게 맞는지 불안해, 더 단단히 해야 했다. 오직 내가 하는 행위만이 사랑이길 간절히 바랐다. '사랑이 밥 먹여주냐?'라고 핀잔하지만 나는 오직 그것만이 밥을 먹여 준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는 결혼 생활이라는 걸 견뎌내기란 얼마나 고통인가. 피땀으로 번 돈을 한푼 쓰지 못하고 내어 놓아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더 못 주어 미안하고 별로인 인간성은 다 드러나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지만 밤이면 다시 살을 대야 단잠에 들 수 있다. 이런 처절한 사랑이 나에게 밥을 주었다. 숱이 줄어드는 그이의 앞머리와 처지는 볼살이 안쓰럽다.


짐이 많다며 밑으로 내려오라는 전화다. 덜렁 배낭 하나 매고 갔는데 무슨 짐이 얼마나 늘었길래 혼자 들 수 없을 정도인지. 차에서 내리는 그이에게 달려가 꼭 안았다. 이내 나를 떨어뜨리고 자기 딸들을 안는다. 트렁크를 여니 태국 향이 코를 스치고 지나간다. 배낭, 종이 상자, 큰 에코백을 나눠 들고 집으로 올라갔다. 아이들이 짐을 풀어헤치기 시작한다. 종이 상자에는 말린 망고와 망고 젤리가 가득 들어있고 에코백에서는 나무 도마와 코끼리 바지 여러 벌이 나왔다. 그리고 조잡한 잡다한 것들이 줄줄이 줄줄이. 말린 망고는 편의점에도 널리고 널렸는데 이렇게 많이 사 올 일인가? 코끼리 바지는 어떤 건 고무줄이 풍덩하고 일부는 너무 탱탱해 배가 쪼였다. 그리고 이렇게 무거운 나무 도마를 거기서부터 데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미간에 주름을 깊이 세기고 짐을 정리했다. 내 눈치를 쓱 보더니 "짜잔, 이거 자기 것." 배낭 깊이 손을 넣고 물건을 꺼내 눈 가까이 들이민다. "선크림 필요하다며." 어둡고 진한 빨강의 조그만 종이 케이스에 'SK-II'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있다. 얇은 비닐을 벗겨내니 빨강 상자가 나눠지며 하나가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두 개나 산 것이냐고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러냐고, 자기는 주는 대로 받았다고 한다. 얼마냐고 물으니 영수증을 내밀며 거기에 40을 곱하란다. 암산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20만 원? 미친 거 아니냐고 소리를 질렀다. 올리브영에 1, 2만 원 짜리도 좋은 게 쌔고 쌨는데 무슨 짓이냐고 나는 거의 울부짖었다.


"무슨 생각으로 하나에 10만 원이나 하는 선크림을 산 거야?"

"내가 언제 화장품을 써 보길 했나, 사 보길 했나, 싼지 비싼지 알 수가 있어야지. 다 그런 가격인 줄 알았어."

"그거 일본 화장품이야."

"뭐, 일제였어?"

"거기 일본어로 뭐라뭐라 쓰여있잖아. 못 봤어?"

"나는 SK텔레콤에서 화장품도 만드는 줄 알았네."


열흘 만에 남자의 팔을 베고 누웠다. 스트레스의 원흉이지만 보드랍고 하얀 팔에 얼굴이 닿으면 다시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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