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우먼스플레잉 여성축구 원데이 클래스 후기
(사진 출처: unsplash)
밤 10시쯤 도착한 성수 방향 용두역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시뻘게진 얼굴을 하고서 한 손에는 편의점에서 산 500ml 생수를 들고 저쪽 끝에 보이는 빈 벤치에 앉았다. 주섬주섬 가방에서 봉지에 싼 운동화와 몇 시간 전 벗어 둔 파란색 양말을 꺼냈다. 신고 있던 니삭스를 돌돌 말아 내려 벗고, 한강 달리기를 할 때 신으려고 사뒀지만 다시 꺼내 신은 지 적어도 1년은 된 것 같은 운동화도 벗고, 가방에서 꺼낸 양말과 운동화로 갈아신었다. 마지막으로, 원피스 아래 입고 있던 반바지를 훌렁 벗었다. 원피스는 마트 화장실에서 운동복 상의를 벗고 급하게 걸쳐 입은 것이었다. 시원했다. 목덜미는 아직도 땀으로 찐득찐득했다. 오늘 운동을 했구나. 지금 입고 있는 원피스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했네. 발목이 시큰거리고 종아리가 당길 때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가라앉지 않을 정도로 운동을 했네. 그제야 실감했다.
축구를 했다. 정확하게는 2시간 동안 배운 거다. 몇 가지 드리블 기술과 슛을 날리는 법, 패스하는 법을 배웠는데 구기종목에 특화된 몸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다. "발 날을 세워보세요. 보이시죠? 이 바깥쪽으로 공을 살짝살짝 건드리면서 가보세요." 네? 가만히 서서 발 날을 세우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공을 몰고 가면서 그 자세를 유지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제 패스를 배워볼게요. 한쪽 발로 런지를 하는 것처럼 자세를 잡고, 반대편 발 안쪽으로 공 가운데를 차면 됩니다." 그렇게 한다고 했는데, 공은 자꾸만 옆으로 빗나갔다. 맞은편 멀리 서 있는 파트너에게 곧장 뻗어 나가지 못하고 풋살장 한쪽 구석에 놓인 작은 골대 안으로 지겹게도 들어갔다. 옆에서 보다 못한 스태프 한 명이 그렇게까지 힘을 많이 주시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냥 편하게 차 보세요,라고 노하우를 알려줬지만 공은 종종 엉뚱한 곳으로 굴러가 주우러 뛰어다니느라 더 숨이 찼다.
몇 달 전 김혼비 작가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라는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절대 어리지 않은 나이에 여자 축구팀에 합류해 뒤늦게 몸 쓰는 즐거움을 알게 된 여성의 간증기이자, 촘촘한 규칙으로 둘러싸인 축구라는 스포츠 역시 인간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존재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순간들로 구성된다는 깨달음의 기록이었다. 엄청나게 재미있으면서도 감동적인 책이었고 그 안에서 묘사되는 축구는 어떤 면에서 훈련의 고통이 상쇄될 만큼 즐거운 스포츠임이 분명했지만, 내가 직접 축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다만 몇 가지 의문은 들었다. 왜 초등학생 때 학교 운동장은 쉬는 시간, 점심시간마다 남자애들이 차지했지? 왜 한 번도 여자애들은 축구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가지 않았지? 중고등학교(나는 여중 여고를 나왔다) 체육시간에는 왜 운동보다 무용을 더 많이 배워야 했는지, 남자애들도 무용 시간에 '순결교육'을 받으며 종이로 만든 순결 은장도를 나눠 갖고 순결 캔디를 먹은 기억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끝장나게 웃긴 축구 에세이를 읽으면서도 축구장에서 직접 뛰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는 건 그렇게 교육받아와서인 건지, 선천적으로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인간으로 태어난 건지 궁금했다는 얘기다.
축구를 하는 내내 '축구를 하는 나'가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다. 우선 가장 놀란 건 축구를 하기에 적당히 길고(무릎 정도) 땀 흡수가 잘 되면서 적당히 헐렁한 반바지가 없었다는 점이었고, 그래서 집에서 잘 때나 입는 짧은 반바지를 입는 바람에 너무 짧지는 않은지, 움직이다가 팬티가 보이지는 않을지 신경 쓰였다. 뛸 때 가슴이 아래위로 움직이는 것도 신경 쓰였고, 마구잡이로 뛰다가 넘어져서 다리에 상처가 생기지는 않을지 신경 쓰였고, 스태프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한 표정으로 포착되지는 않을지 신경 쓰였고, 아무튼 모든 게 다 신경 쓰였다. 팀을 짜서 네 명 대 네 명으로 시합을 하기 전까지는. 패스나 드리블을 배울 때까지만 해도 하하호호 웃던 다른 여성들의 눈빛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합은 7분씩, 총 네 번을 할 거예요. 자, 다른 팀과 인사하고, 악수도 하세요. 팀끼리 파이팅 구호도 외치시고. 그리고, 시-작!
기술은 잘 모르겠고, 일단 내 쪽으로 공이 굴러오면 어떻게든 사수해서 같은 팀 멤버들에게 패스했다. 다른 팀도 거의 끝장을 내겠다는 기세로 달려들었다. 딱 7분을 뛰고 나니 목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7분이 이렇게 긴 시간이었어?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 팀, 호흡이 좀 잘 맞는 것 같지 않아요?" 2리터 들이 생수와 파워에이드를 나눠마시며 한 멤버가 말했다. "다음번 시합에는 작전을 짜서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다른 멤버도 말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실 필요가... 잠깐 당황했지만 그래, 기왕 시합을 한다면 이기는 게 좋다. 두 번째 시합이 시작되기 전, 같은 팀 멤버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한 명이 소곤거렸다. "포지션을 나눌까요? 제일 뒤쪽에서 수비하실래요?" 나는 수비수, 근성 있게 공을 잘 쫓아다니는 분은 공격수, 그리고 발이 빠르고 패스가 정확한 두 분은 미드 필더가 되었다. 클래스 내내 나와 짝을 지어 패스를 주고받는 동안 조용히, 열심히 공을 차기만 하던 파트너는 거의 마라도나가 되어 공과 한 몸이 된 채로 풋살장을 누볐다. 우와, 이야, 너무 잘해!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가 한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우리 팀은 총 세 골을 기록했고, 골이 들어갈 때마다 나는 오늘 처음 본 사람들과 손을 마주 잡고 소리까지 지르며 방방 뛰었다. 그런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닫아두었던 풋살장 창문인지 블라인드인지를 열자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와, 이렇게 시원한데! 다들 웃었다. 나머지 몇 개의 풋살장에서는 남자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풋살인지 축구인지 잘 모르니까 그냥 공놀이라고 해두자) 모두 함께 둥그렇게 모여 서서 마무리 인사를 하고, 나는 풋살장이 있는 건물 1층으로 내려와 문 앞에서 택시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고민했다. 옆으로 지나가던 한 여자분이 웃으면서 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가세요! 수고 많으셨어요. 나도 대답했다. 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는 왠지 쑥스러워서 빠르게 걸어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축구를 하는 동안은 잊고 있었던 발목과 종아리, 허벅지, 허리 통증이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 내일은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훨씬 더 아프겠지. 그럼 뭐 어때.
발바닥으로 공을 살짝살짝 건드리면서 가보세요.
발바닥의 감각에 이제는 좀 익숙해졌죠?
지하철을 기다리며 클래스 내내 들었던 코치님의 말을 떠올렸다. 2시간 동안 축구의 그 어떤 기술에도 익숙해지지 못했지만, 발바닥으로, 발 바깥쪽으로, 그리고 안쪽으로 공을 밀거나 건드린다는 감각을 이제는 안다. 그밖에 다른 감각들도. 적어도 축구를 잠깐이나마 배우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