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전자책 클럽
지난해 여름 즈음부터 올해 1월까지, <29cm> 매거진에 영화와 드라마 글을 썼다. 정확히는 영화와 드라마 글을 빙자한 내 이야기를 썼다. 어쨌거나 읽는 사람들이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가이드는 얻을 수 있어야 하니 줄거리나 등장인물, 최대한 객관적인 척하는 정보 같은 것들을 어떻게든 담아야 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그것과 상관없이 (미안하게도) 오직 나를 위한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한 번도 얘기한 적 없던 생각들, 완전히 까먹은 줄 알았던 어떤 기억들. 입으로 말하자면 부끄러워지는 종류의 이야기도 많았지만 놀랍게도 나라는 사람을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는 불특정 다수에게 읽히는 글이라고 생각하자 그럭저럭 용감하게 쓸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글들을 읽은 독자들은 사실상 해당 작품의 전체적인 그림, 정확한 정보, 객관적인 비평 - 물론 완벽하게 객관적인 비평은 존재할 수 없지만 - 과 관계없는, 나라는 사람의 필터를 통과한 아주 일부분만을 알게 됐다고 할 수 있겠다.
그건 아무래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매체의 기자로서 몇 년 동안 내가 훈련받은 건, 관점은 드러내되 이것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이야기로 비치지는 않게끔 하는 원고 작성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이라는 표현이 들어가거나, 혼자만의 경험이 글 안에서 언급되는 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 지양되었다. 특정 콘텐츠에 관해 어떤 방향으로든 판단하는 리뷰라면 더더욱 그랬다. 내가 쓰는 글이 좀 더 나의 이야기에 가까워도 되겠구나, 그걸 알게 된 건 안은별 님의 인터뷰집 <IMF 키즈의 생애>를 읽고서였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이 골라낸 인터뷰이들의 특징이 (저자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한계 때문에) 유사하며, 때문에 IMF라는 사건이 80년대생들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두루 알아볼 수는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영원히 들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으로 사실은 내가 그 이야기를 찾아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라고 의심한다. 책의 이런 한계를 아쉬워하거나 비판한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IMF 키즈의 생애>에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안은별 씨가 건져 올릴 수 있었던 인터뷰이들의 이야기를 인상 깊게 읽었고, 그 속에서 다시 85년생인 나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마치 안은별 씨가 언젠가 썼던 다니구치 지로에 관한 이 문장처럼. "그의 한계가 곧 성취였음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완전히 껴안는 대신 내가 갇힌 자리를 클로즈업하게 만드는 렌즈로 쓰는 것이, 그의 작품을 읽는 즐거움이자 그를 보내는 방식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ize> / 다니구치 지로, 그와 동시대인으로 만나는 법 http://ize.co.kr/articleView.html?no=2017021923067253813)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은 바로 그런 내용이다. 루시 바턴은 병원에서 보낸 시간으로부터 출발해 가난했던 유년기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던 가족들, 결혼생활, 스쳐 지났던 사람들에 관한 기억을 조금씩 끄집어내고, 책의 중간쯤 우리는 루시 바턴이 작가가 됐음을 알게 된다. 특정한 시간과 경험을 통과한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사람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절대 알 수 없을 것임을." 그러니까 타인에 대해 함부로 표현하지 말고,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 것. 오로지 내 안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 그것으로 다른 이들과 만날 것. 그게 결국 작가가 하는 일일 것이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다르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잠깐 <레이디 버드>에 관한 윤이나 님의 문장을 빌려본다. "어떤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주인이 기록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만 그 이야기가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레타 거윅의 이야기가 제시카 차스테인이 겪은 삶의 평행우주이며, 실은 나와 또 내 친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은 놀랍지 않은가." (엄마, 나를 좋아하긴 해? https://brunch.co.kr/@yooninas/1)
또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작품을 함께 언급할 수밖에 없다. 마가렛 애트우드가 쓴 원작을 드라마로 만든 넷플릭스 <그레이스>에서 주인공 그레이스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 누군가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와는 관계없이(그레이스의 진실을 우리는 끝까지 알 수 없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로 서사를 구성한다. 이야기의 주인은 오로지 그레이스뿐이며, 그가 구성한 이야기가 곧 진실이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계급의 여성으로 살아온 그레이스가 만든 이야기는 또 다른 여성에게 가 닿아서 다시 그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조각 하나하나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것들을 이어 붙이면 하나의 그림(이야기)이 되는 퀼트 조각보처럼.
그래서, 나는 계속 글을 쓸 것이다. 나의 이야기가 가치 있을지 없을지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 나의 이야기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나의 것이다. 한국에 살고, 여성이며, 페미니스트이기도 하고, 엄마를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밖에도 많은 것을 사랑하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못 견뎌하는, 그런 나의 것. 이런 나를 마주 보고 지켜내고 인정하며 어쨌든 계속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 ㅡ 일리노이 주 앰개시 ㅡ 에는 가지 않을 거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 거야!, 라고. 이것이 그 냉혹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 211p)
"나는 요즘 혼자 집에 있을 때,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조용히 소리 내어 말해본다. "엄마!" 그게 뭔지 나는 모른다ㅡ내가 내 엄마를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날 두 번째 비행기가 두 번째 빌딩을 들이받는 것을 본 베카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인지. 내 생각엔 둘 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건 내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이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몰라의 이야기이자 내 대학 룸메이트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프리티 나이슬리 걸즈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엄마. 엄마!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 것이다. 이 이야기만큼은. 그리고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다." (223p)
페미니스트 전자책 클럽
여성이 쓴 작품을, 전자책으로 읽고 기록하는 독서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