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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May 08. 2016

불분명한 목적성, <위플래쉬>

whiplash, 2014

화제가 되었던 영화 위플래쉬를 봤다. 현란한 드럼 연주와 경쾌한 재즈를 영상과 함께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어째 영화를 보면서 Whiplash와 Caravan을 맘 편히 감상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주인공의 목숨 건듯한 처절한 연주와 강렬하고 짧은 쇼트의 장면 연결이 더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연주 장면만 불편(?) 했던 것은 아니다. 영화 전체가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했다. 스튜디오 밴드의 연습과 합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주인공이 극장에서 알바생과 썸타는 장면과 첫 데이트 장소에서 조차 대화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불편함이 있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과의 식사에서도, 주인공이 침대에 누워 음악을 들을 때도, 아버지와의 대화, 오랜만에 만난 교수와의 대화에서도 여유와 웃음은 없었다.



최고가 되기 위한 열정과 광기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 예술이든, 그 외의 것이든 최고의 경지에 이르고, 이름을 남기는 일은 정말 가치 있는 일일까. 그것이 자기 파괴적이고, 주위를 황폐화시킨다 해도 아름답고 숭고한 열정일까. 어느 영화 평론가가 말했듯이, 미와 선이 무관할 때 선하지 않은 위대한 아름다움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는 쉽지 않은 문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이 길다지만 결국 그 작품은 한 인간의 창작품일 뿐이다. 아무리 완벽하고 뛰어난 연주도 그것을 연주한 연주자의 천재성과 실력이 만든 공예품에 불과하다. 즉, 예술의 이면에는 한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예술의 광기는 최고의 작품을 창조하는 조물주의 영역에 도전하는 욕망과 같다. 그렇기에 위대한 예술을 감상할 때 느껴지는 숭고함과 황홀함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대리만족과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죄책감과 불편함이 있는 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면서 순간 플레쳐가 채찍질하는 대사와 행동에 내가 조련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목숨 걸고 무언갈 위해 열정을 쏟았었나. 그런 질문들이 생각나면서 막연한 뜨거움이 솓구쳤다. 하지만 이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그렇게 느낀 내가 소름끼쳤다. 주인공이 무얼 위해 드럼을 치는지, 왜 버드리치가 되고 싶어하는지 영화에서는 알려주지 않았던 것처럼 무엇을 위한 열정인지, 뜨거움인지 몰랐다. 1등 만능주의와 성공지상주의의 문제는 순수한 열심의 무고함 보다 불분명한 목적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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