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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May 07. 2018

운명 vs 자유의지, <마이너리티 리포트>

Minority report, 2002

인간은 운명의 굴레 아래 살아가는 존재일까? 아니면 운명을 개척하는 주체적인 존재일까?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과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론에 대한 논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스티븐 스필버그의 2002년 작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2054년 미래 '프리크라임'이라는 사전 살인 예측 시스템을 소재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을까?',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답한다. 좀 더 명확히 하자면, 양자 중 한 쪽의 손을 들어 준다기 보다, 질문 자체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 말한다.  
            


[영화 줄거리]

2054년 워싱턴. 존 앤더튼(톰 크루즈 분)은 범죄가 일어나기 전 범죄를 예측해 범인을 잡는 프리 크라임 시스템의 특수경찰이다. 프리 크라임 시스템으로 인해 워싱턴은 살인율이 제로가 되었지만, 대니 워트워(콜린 파렐 분)이 시스템을 감사하기 위해 나온 이후로 존과 대니는 부딪치기 시작한다. 시스템의 오류를 파헤치는 대니와 시스템을 신봉하는 존의 갈등은 시스템이 존을 살인 예정자로 예언하면서 극적으로 치닫는다. 존은 스스로 절대 살인하지 않을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시스템의 예언자 중 한 명인 아가사(사만다 모튼 분)을 납치하여 살인 현장으로 간다. 그러나 자신이 죽일 것이라고 예언된 사람이 자신의 아들을 납치하고 죽인 납치범임을 알고, 존은 다짐과는 달리 결과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납치범은 존이 살인을 저지르도록 시스템을 만든 라마 버제스(막스 폰 시도우)에 의해 고용된 사람이었고, 막스는 아가사를 이용해 프리 크라임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아가사의 엄마를 죽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영화 속 프리크라임은 범죄를 실제로 행하기 이전에 범죄를 예측해 범죄자를 잡아 단죄하는 시스템으로, 결정론의 철학 위에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세워졌다. 하지만 이것은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의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자가당착 모순의 치명적인 논리적 한계를 갖는다. 미래를 예측하여 결과를 바꾼다는 것 자체가 '결정론'의 '미래는 정해져 있다' 기본 가정과 정면으로 부딪히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 속 프리 크라임은 철학적, 논리적 관점에서 불가능한 시스템이다. 또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책임을 묻는 일 역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프리 크라임' 시스템이 흥미로운 것은 운명과 자유의지라는 풀리지 않는 논쟁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운명과 자유의지에 대한 질문은 우주라는 시공간에서 찰나의 시간을 거쳐가는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존재론적 질문이지만, 그것이 증명해낼 수 없는 진리의 문제라는 점에서 철학적, 논리적 또는 도덕적 논쟁이 된다.

운명 VS 자유의지
운명론(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대립에 있어 강한 결정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는 스피노자다. 결정론은 흔히, 16세기 종교개혁가 칼뱅의 "예정론"과 혼동하여 쓰이는데 둘은 조금 결이 다르다. 결정론(운명론)은 '기독교의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미래까지 주관한다'는 종교적 결정론과 근대 수학과 과학을 집대성한 뉴턴을 필두로 '자연과학의 원리를 통해 인과 관계를 파악하면 미래까지 예측해 볼 수 있다'는 근대 과학의 결정론으로 나뉜다. 반면 "예정론"은 마틴 루터 이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인 칼뱅의 구원에 관한 이론으로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태초를 창조하기 전부터 구원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이미 정하여 놓았다'는 신학적 이론이다.

자유의지론을 주장한 철학자는 데카르트, 칸트,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가 있으며, 인간은 주체적으로 선택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이론이다.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면 굳이 바꿀 수 없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발버둥 칠 필요가 없고, 모든 행동의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행위의 도덕적 책임을 행위자에게 물을 수 없기 때문에 결정론은 틀렸다고 말한다. 지금 생각하고 선택하는 결정의 동기가 '나'임을 부정할 수 없기에 자유의지론은 실존주의자들에게 필수적인 철학적 바탕이 된다.  
 
흥미롭게도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이 양립 가능하다는 견해도 있다. <개소리에 대하여>로 유명한 프랭크 퍼트가 대표적인 철학자인데,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 해도 그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두 이론의 절충안 정도라고 봐도 좋다.  

결정론이든 자유의지론이든, 양립 가능론이든 궁극적인 문제는 그것이 철학적 논쟁의 주제일 뿐 결국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다는데 있다. 즉, '운명이 정해져 있느냐', '미래를 적극적으로 개척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존재하지만, 그에 대한 정답지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답을 알 수 없다면, 문제를 대하는 관점을 달리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면, 문제의 정답을 맞히려 하기 보다 문제 자체를 통해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존은 자신이 신봉하는 결정론의 끝판왕인 '프리 크라임'에 대항하여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순간에 서지만, 좀처럼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한다. 그때, 프리 크라임의 핵심 예언자인 아가사는 역설적으로 존에게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자 역시 미래는 운명에 의해 한 가지 길로만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선택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신은 선택할 수 있어요


존은 결국 아들을 죽인 살해범을 죽이지 않음으로써, 예정되어 있던 미래와 다른 선택을 한다. 하지만, 살해범은 존이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의 가족들이 돈을 받을 수 없다며, 존의 총으로 자살한다. 궁극적으로 존은 아가사가 예언한 대로 살해범을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지만, 그로써 프리 크라임이 조작된 시스템이라는 것을 밝혀 낸다. 존은 자신의 운명대로 미래가 펼쳐졌지만, 그 운명에 그저 순응하지 않았고, 부분적으로 개척하여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낸다.


어쩌면 운명이란 게 있는지 모른다.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운명이라는 숙명 아래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과 믿음이다. 그 선택이 운명 안에서 이루어진 결정론적 행위이든,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든, 결국 행위를 하는 주체는 '나'임을 자각할 때 '선택' 자체가 숭고해질 수 있고, 그로 인해 선택에 대한 책임까지 다할 수 있다. 결정론을 믿었던 존이 결국 자신의 운명 앞에서 스스로의 선택을 하듯, 무엇이 맞고 틀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를 갖고 삶을 살아갈 것이냐'의 문제다. 삶이 초월적 존재로 인해 정해져 있다 한들, 그것이 숭고한 실존적 삶에 대해 되는대로 살고, 수동적으로 살아도 된다는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운명이라는 Majority report(다수의견)에 굴하지 않고 삶의 적극적인 주체로서 Minority report(소수의견)를 견지하는 태도는 운명과 자유의지의 근원적 논쟁의 가치만큼이나 중요하다. 설사 Majority report가 결국에 맞는다 하더라도 그 과정 속의 수많은 자유의지와 선택은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정론을 믿었던 존이 결국 자신의 운명 앞에서 스스로의 선택을 하듯, 무엇이 맞고 틀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를 갖고 삶을 살아갈 것이냐'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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