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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Aug 12. 2017

가면을 쓴 나

나 자신이 되는 것

넌 참 좋은 사람이야


어느 모임, 어떤 관계에서도 나는 좋은 사람이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착한사람 콤플렉스' 이든, 정말 성격이 쿨해서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넌 참 좋은 사람이야', '넌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것 같아' 와 같이 정말 특징 없는 칭찬?을 들었다. 이십대 초중반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이 모임 저 모임에서 여러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나는 내가 생각했도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괜찮은'의 의미는 모나지 않고, 얘기 잘 들어주는 순전히 상대방의 관점에서의 '괜찮은 사람'. 그런 와중에 정작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나 스스로에게 관심을 갖지는 못했다. 잠깐의 만남 속에서도 내 생각과 욕망 보다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 상대가 어떤 반응을 할지가 내 에너지 소비의 주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문제가 생겼다. 당시 내가 느낀 '문제'는 그것이 무슨 '문제'인지도 모른채 그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의 혼란이었다. 사람들과 만나 재밌게 놀고, 이야기하고 돌아가는 귀가길에 밀려오는 공허함과 허무함이라는 감정의 실체로 무언가 잘못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한 친구의 말 한마디에 무너졌다.


넌 그냥 다 좋다고 하잖아. 평화주의자잖아


그것은 '오빠 미안해.. 그래도 오빤 참 좋은 사람이야..' 라는 흔한 고백 까임 문자? 처럼 말 그대로의 긍정적 의미와는 반대로 맥락으로서 부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굳이 그 친구의 말을 번역기로 돌려보면 이정도가 아니었을까.


넌 임마 그냥 주관이 없어. 다 맞춰주기만 하고, 니 색깔이 없어. 그냥 다 좋데. 그라믄 재미 없어.


'좋은 사람'이라는 만큼 좋지 않은 의미를 많이 담고 있는 반어법도 없다 


'좋은 사람'의 사전적 의미는 그야말로 착하고 배려심 깊은 좋은 사람이겠으나, 현실에서의 '좋은 사람'은 어쩌면 '자기 보다 다른 사람을 더 배려하는사람' 의 의미인지 모르겠다. 그게 뭐가 문제인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 보다 약한 사람을 배려하고, 대화를 할 때는 경청하고, 친구들과는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이 미덕으로 배워왔고, 그것을 충실히 지켜온 내 삶에서 그 친구의 한 마디 말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그저 평화주의자로 살아온 내가 뭘 잘못한거지? 라는 단순한 의문이 아닌, 이십여년 쌓아온 삶을 바라보는 내 가치관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뭐가 잘못된거지? 그럼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거지? 적당히 이기적인 마음을 갖고 적당히 착하게 살아야 하는건가?  이런 의문들이 들면서 관계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고민의 끝에서 내가 바라본 나는 '가면을 쓰고 있는 나' 였다. 나 보다 상대방의 반응이 더 중요했고, 상대방이의 편함이 내 편함이었다. 그것은 상대방을 생각하는 배려라기 보다, 그저 갈등과 충돌을 회피하고자 하는 내 욕망에 기인한 것이었다. A모임에서는 개그맨이 되고, B모임에서는 진지충이 되고, C군을 만날 때는 마초가 되며, D양을 만날 때는 교회오빠가 되는 나는, 관계 맺는 대상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가면을 돌려가며 쓰고 있는 연기자였다. 연기를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고, 더 많은 에너지가 들었다. 더 큰 문제는 내가 가면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면을 쓰고 있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두려움이 몰려왔다. 


가면을 쓰는 게 문제가 아니다. 가면 안의 내 얼굴을 모르는 게 문제다
그럼 가면을 벗은 나는 어떤 모습이지? 
가면을 벗었을 때 내 얼굴이 없으면 어떡하지?


가면을 돌려가며 쓰고 있었다는 사실 보다 무서웠던 것은 가면을 벗은 진짜 내 모습을 알지 못하는, 정체성의 無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진짜 내 모습이 내가 이상화한 '나'와 많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직접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경험이다. '나'라는 몸뚱아리는 들고 다니는데, 정작 '나'의 인식과 실체가 느껴지지 않는 심리적, 정서적 '죽음' 과도 같은 경험이었다. 십여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미소지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당시 누구에게도 말도 못하고 끙끙앓은채, 가면을 돌려 쓴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가면을 썼던 나는, 마음 깊숙히 참 힘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도 극적인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작은 것부터 바꿔보자는 마음으로 내 마음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로 했다. 불쾌한 말을 들었을 때 그 전 같으면 내색하지 않았던 서운함을 어설피 표현해보기도 하고,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아 라고 말하던 메뉴 선정 시간에는 '짜장면' 먹자라고 용기 내어? 말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새삼 생각보다 타인이 내 반응과 내 의견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지극히도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조금씩 나 스스로 내 마음과 욕망에 관심을 갖고, 깊숙한 심연까지 들어가 보기도 했다. 다행히도? 내가 이상화하는 '나'와 큰 괴리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바꿔야 할 부분들은 많았다. 


그것은 내가 돌려가며 쓰고 있던 가면을 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가면은 유용하고 필요했다. 다만, 가면을 쓰는 횟수를 많이 줄였다. 친구를 만날 때, 매우 형식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나는 가면을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나갔다. 그리고 그 때부터 '네 자신이 되라'는 말을 주문처럼 마음에 품고 살았다.


'Be yourself'

'Be myself'


'나 자신이 되라'는 주문. 사실 30대가 훌쩍 넘어버린 지금도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가면 속 진짜 내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가면을 벗고 화장을 지워낸 얼굴이 산뜻하고 편한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진짜 내 얼굴이라고 생각한다면 '가면을 벗은 나'는 '스스로 편한 나' 이다.


가면을 벗기 위해서는 먼저 '불편한 나'를 인지하여 돌아보고, 그것을 벗기 위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면을 벗은 나를 직면하여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돌봐야 한다. 그것이 '나 자신이 되는' 첫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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