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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증의 모녀지간

by 황마담
외증조 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사진이다. 좌측의 꼬마 남자 아이가 막내 외삼촌.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딸을 알려면 그 엄마를 보면 된다고-


그런 맥락에서.. 나에 대해 알려면 우리 엄마를,

또 우리 엄마에 대해서 알려면 우리 외할머니를,

얘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외할머니의 이름은 강순이.


그 시대의 여자들이 흔히 그랬듯이,

글이라는 건 배워본 적도 없는 까막눈에...


(내가 고등학생 때에 비로소 할머니가

한글을 모르는 까막눈이셨다는 사실을 알고,

엄청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15세에 외할아버지에게 시집 와서,
시부모님까지 모시고 살면서,
호된 시집 살이를 견디며 2남 3녀를 낳았다.


(내가 아주 어릴 때, 그때까지도 꼬장꼬장했던
외증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본 기억이 있다.


두 분 모두 90세가 넘게 장수 하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외할머니가 모셨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세월이었다고 하겠다.)




외할아버지는 철도 공무원이셨는데-

안정적인 직장에, 돈도 제법 잘 벌어왔다고는

하지만, 치명적으로... 알콜 중독자셨다.


멀쩡하던 사람이 술만 마시면 엄청나게

폭력적으로 돌변해서, 술상을 뒤집어 엎고,

물건을 다 때려부수고, 할머니를 때리고...


(심지어 나도 어린 시절에,
그런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ㅠㅠ)


그런데 희안한 건, 술에 취한 할아버지의

폭력의 대상은 오로지... 할머니 였다.


적어도 자식들은 할아버지의 폭력을 말리지만

않으면, 직접적인 폭력을 당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외할머니가

숱하게 맞은 건 말 할 것도 없고,


차마 말릴 수도 없었던 우리 엄마는 늘

눈치 보며 도망 다니느라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배회한 날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매일 맞고 살던 까막눈 할머니가

의외로 계산과 사재에는 또 너무나 밝으셔서,


할아버지가 벌어온 돈에,

자신도 공장에서 일한 돈을 모아모아...

땅을 사고, 부동산 투자를 하시더니-


나중에는 집을 무려 5채나 갖고 계실 정도로

부자가 되셨으니 참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할아버지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 였는지..
아니면, 정말로 돈을 벌겠다는 욕심 때문이었는지..


아무튼 할머니는 공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사회생활을 빌미로 집을 비우기 시작하셨고,


그 빈자리는 고스란히...
맏딸인 우리 엄마의 차지가 되었다.


엄마는 중학교 때부터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고,


형제들의 도시락까지 다 싸줘야 하는 건 물론이고,

할아버지의 술시중과 난장판이 된 집 정리까지도

모두 우리 엄마의 몫이 되었으니...


할머니에 대한 엄마의 애증은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듯 하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시부모님과 할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반작용이

어이없게 아들을 향한 맹목적 신뢰로 이어져서,


(그것도 오직 엄마의 오빠인

큰 외삼촌 - 장남을 향해서만 이었다!

물론 그 다음으론 막내 외삼촌이긴 했으나,

그건 정말 조금이었고, 둘 사이의 갭은 아주 컸다;;;)


먼 훗날, 할머니의 전 재산을 큰 외삼촌이 꿀꺽!

다 말아잡수시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니-


이에 대한 다른 형제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가 커진 만큼 갈등도 깊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엄마는 장녀의 책임감으로

아직 요양원에 생존해 계시는 외할머니를

끝까지 혼자 책임지고 있는 입장이니... 더더욱!

그 애증의 골이 깊을 수 밖에 없다 하겠다.





무려 70년이 넘는 세월동안 켜켜히

쌓일 수 밖에 없었던, 깊은 애증의 모녀 지간.


그 내밀한 사연과 복잡한 감정들은

내가 도저히 가늠조차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 하나는 안다.


애증이 깊은 만큼,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

가장 슬퍼할 사람도 우리 엄마라는 걸…


그러니까 할머니...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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