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 시절에도 로맨스는 있었다.

by 황마담
흰 저고리를 입은, 젊은 시절 외할머니의 모습이 참 곱다 ^^


불과 3년 전.

엄마를 통해 처음으로, 외할머니에 대한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건 바로... 외할머니의 불륜이었는데-

내용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거의 비슷했다.




넓고 오래 된 한옥에 살면서,

조금이라도 생활비를 벌어보겠다는

알뜰함을 무기로, 사랑채에 세를 들였는데..


하필 젊은 남자가 들어왔고,

그와 외할머니가 찌리릿- 눈이 맞은 것이었다.


서로 얼마나 뜨겁게 불타올랐는지...


외할머니는 딸인 우리 엄마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줄도 모를 정도였고,


충격적인 불륜의 현장을 여러 번이나 목격하게 된

엄마는 어린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혹여 다른 가족들에게 들킬 새라,

내색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집 밖을 배회했다는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결국 불륜은 모두에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




경남 산골 출신으로-

직장 때문에 혼자 부산에서 세들어 살았던

남자는,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다고 했다.


(그 사실을 우리 엄마만 몰랐던 건지,

외할머니도 몰랐던 건지는 알 수 없다;;;)


격노한 외할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찾아온 남자의 부인은 마치 자기가 죄인인 마냥-

한없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남자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단다.


그걸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후, 엄마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또 한번 목격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엄마를 앞장 세워서 어디론가 향했던 외할머니는,


어느 한 산소 앞에 이르러-

그 앞에서 한없이 많은 눈물을 쏟아내셨다는데..

바로 그 남자의 무덤이었다.


평소에도 희여멀건해서 병약해 보였다는,

그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륜의 대상이었던,

외간 남자 때문에 눈물 흘리는 외할머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뭔가..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외할머니에 대해 엄마가 갖고 있는

뿌리 깊은 미움 - 애증의 근원과,


알콜 중독이었던 외할아버지가 왜,

외할머니에 대해서만은 유독 폭력적이었는지...


그 비밀의 열쇠를 찾은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동시에, 모두에게 연민이 느껴졌다.


아내의 불륜을 용서하지 못한 채로- 평생 같이

살아야 했던 외할아버지의 복잡했을 심정도,


바람난 엄마와

폭력적인 술 주정뱅이 아버지 때문에,

끔찍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을 우리 엄마도..


다 너무 이해되고, 가여웠다.

특히, 우리 외할머니 - 강순이 여사까지도!!!


할머니 - 엄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여자로서,

그녀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1930년 생으로,

찢어지게 가난하고 무지했던 시절에 태어나,

학교는 근처에도 못 가본 까막눈으로 자랐고-


15세에, 얼굴 한번 못 본 남자와 중매로 결혼해,

시부모님에 - 시누이들까지 모시고 살았던,

호된 시집살이를 견뎌내면서..


18세에, 첫 아들을 낳은 이래로 쭈루룩-

무려 다섯 명의 자식들을 낳고 키웠으니..


그저 사느라 바빴을 할머니의 고단한 인생 속,

어디에 가슴 설렌 사랑이 있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 사랑방 손님이 할머니의 인생에 찾아온,

처음이자 마지막 로맨스가 아니었을까...?




내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고랫적 그 시절에도,

불타는 청춘들의 뜨거운 로맨스가 있었음을..

새삼 깨닫고,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비밀을 알게 된 후로 왠지..

외할머니가 인간적으로 더 가깝게 느껴졌다.


(엄마에겐 차마 솔직하게 밝힐 수 없지만;;

그리고 외할아버지에겐 정말 죄송하지만;;;)


로맨스를 꿈꾸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났던...

할머니의 사랑이 하늘나라에선 이루어질 수 있기를.

그곳에선 맘껏 사랑하실 수 있기를... 바래본다.


keyword
이전 05화애증의 모녀지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