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 #22.
대동제 때를 추억하다 보니,
이번에는 “메이퀸”이 생각났고..
“이대 메이퀸”에 대해서,
무수한 오해와 거짓들이 난무하는 것 같아서!!
그 진실을 한번 밝혀 보도록 하겠다. ^^ㅋ
‘5월의 여왕’ 이라는 뜻의 “메이퀸” 은,
이화여대가 한국에서의 시초이긴 했으나-
그 의미가 사뭇 달랐는데..
1908년에 열린 22회 이화학당 개교기념 축제에서
창립자였던 미국인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부인에게
꽃을 엮어 만든 관과 함께, "메이퀸"이라는-
칭호를 헌사한 것이 그 시초였기에..
"메이퀸"의 시작은, 스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학생들 중에서 "메이퀸"을 뽑았던 건,
1927년부터였는데..
이 때도 선정 기준은 성적, 품행, 신앙 등-
졸업 예정 학생들 중에서 우수한 학생을,
투표로 뽑는!! 대회를 만들었던 것이었고..
(흔히 생각하는, 미(美)의 기준이 아니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1933년부터 중단되었던,
메이퀸 대회는.. 개교 70주년이었던-
1956년에 다시 시작이 되었는데..
이 때에도, 자격 규정은..
“각 대학 각 학과 4년 급에서 (개신교) 신자로서
신앙이 돈독하며 성적과 품행이 우수하고
활동적이며 지도자격이 있는 대표적 인물.”
이런 기준으로, 각 과에서 한 명씩의!
메이퀸 후보자가 투표로 선출된 후!!
(특이한 점은, 선출된 후보자는..
기권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교수와 동창생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최종 투표를 거쳐,
최고 득표자가 "메이퀸으로 선출!!" 되었다.
따라서, 민주적인 투표의 결과였으므로!!
스스로의 의지와 비용으로 출전했던,
일반적인 미인대회와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대관식까지도..
선출되었던 각 과의 퀸들까지 모두 참석한 가운데,
의상은 한복에, 아악으로 연주를 했으니..
이는,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보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60년대 중반부터 갑자기 메이퀸 대회가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주목! 을 받게 되더니-
잡지에, 표지 모델로 등장을 하게 되기도 했고..
(대관식 때의 사진을 그냥 막 갖다 쓴 거였다;;;)
나중에는, 대관식 자체를 취재하기 위해서..
헬기까지 뜨고!!
구경을 하겠다고 몰려드는 인파에..
메이퀸의 옥좌가 무너지는 사태까지 발생!
이렇게, 사회적 관심이 과열되자-
동문과 재학생을 중심으로,
메이퀸에 대한 회의론이 불거지기 시작했고..
전체 과의 절반에 달하는 24개과가,
성 상품화와 평등권 위배를 들어-
과 퀸의 선발을 거부하면서..
1978년에, 메이퀸은 폐지! 되었다.
따라서, 메이퀸의 유구한 역사 속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 "메이퀸"이 존재했던 기간은,
겨우 10년 남짓. 아주 짧게! 존재했던 셈인데..
그것마저도,
선정의 기준과 방법이 전혀 달랐으니..
누가 과거에 이대 메이퀸이었다더라..
류의 ~ “카더라 통신”의 대부분은,
새빨간 거짓말! 이라고 할 수 있겠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