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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만복 Sep 27. 2022

산타와 사탄

산타클로스는 어디로 갔을까 #2

크리스마스이브. 밖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끼-이-익. 금속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비명소리와 함께 사람 키보다 높은 교도소 정문들이 차례대로 열리기 시작했다.


이 문을 지키는 사람도, 이 문을 통과하는 사람도 쏟아지는 눈앞에서는 하나의 눈덩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각자 다르게 품고 있는 마음가짐처럼 표정들이 모두 달랐다. 


마침내 낡은 세상을 향한 마지막 철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일제히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교도관들은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는 그들을 향해 기약 없는 배웅을 전했다.


오랫동안 정문 앞에 서있던 몇몇 사람들은 낯익은 얼굴이 비치자 서로 얼싸안으며 안부를 물었다. 어떤 사람들은 다 같이 손을 잡고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마중 나온 사람 없이 쏟아지는 눈 속으로 쓸쓸히 사라질 뿐이었다.


출소자들 중 마지막 행렬에 속한 그는 비로소 정문을 빠져나왔다. 그는 눈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힘없이 정문 앞에 서서 쏟아지는 눈을 구경했다.


그 사이 앞에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계획도, 고민도 없었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나간 정문 앞은 쏟아지는 눈 때문에 조금의 길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썹 위로 차가운 눈송이가 쌓일 때쯤, 누군가가 그의 옆에 다가와 담배를 내밀었다. 그가 옆을 바라보자 자신보다 훨씬 커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서있었다.


그가 남자를 향해 거절한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남자는 말없이 들고 있던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품 속에서 짝퉁 명품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벌써 크리스마스라니. 쓸데없이 시간만 가네."


남자는 연기와 한숨을 섞어 떨어지는 눈 속으로 길게 흘러 보냈다. 그는 남자가 옆에서 담배를 피우든, 말을 하든 관심 없는 표정으로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때는 크리스마스 같은 건 알지도 못했어. 다들 개처럼 벌기 바빴으니까. 그때는 애새끼들도 뭐 사달라고 못했어. 밥 한 끼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니까. 그런데 요즘에는 산타클로스한테 소원 비는 척하면서 지 부모한테 선물 달라고 협박한다면서. 에휴. 여우 같은 놈들. 형씨도 아직 젊은 거 보니까 산타클로스 세대인가."


남자는 곁눈질로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문에 걸어놓은 북어처럼 아무 반응이 없자, 남자는 괘씸하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어나갔다.


"형씨. 산타클로스. 그거 다 상술이야. 상술. 발레타이 뭐시기 날처럼 멍청이들한테 물건 팔아먹으려고 만든 날이라고. 그런 거 보면 외국 놈들이 참 머리가 좋아. 우리 회사도 그런 걸 했었어야 했는데."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시 입에 갖다 대자, 뻑뻑 소리와 함께 입김만 나올 뿐 연기가 나지 않았다. 말하는 사이 내리는 눈 때문에 불씨가 꺼져버린 것이었다. 남자는 신경질 내듯 라이터를 꺼내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형씨, 내가 말이야. 지금 이렇게 보여도 대한민국에서 내 이름 석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 지금 비록 누명을 써서 이 꼴이 되었지만. 아니지. 어떻게 보면 이것도 국가적 낭비지. 나 같은 인재를 이딴 허접한 곳에 가두면 나라가 잘 돌아가겠어? 안 그렇수? 형씨."


남자가 쉴 새 없이 말하는 사이 멀리서 불빛 하나가 다가왔다. 스쿠터였다. 아직 고등학생도 되지 않은 듯 앳되어 보이는 남자, 여자아이가 헬맷도 쓰지 않은 채 스쿠터에 타고 있었다.


스쿠터는 그들보다 약 오십 보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여자아이만 내려 그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이의 얼굴을 알아본 남자가 두 팔을 벌리며 반갑게 소리 질렀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공주님 아니신가."


그러나 여자아이는 조금의 감정도 없는 얼굴로 남자를 맞이했다. 짙게 그려진 화장과 짧게 줄인 교복차림이 서로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아이의 반응에 남자의 어색한 두 팔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아빠, 안녕. 엄마가 말 전하라고 해서 잠깐 들렸어."


여자아이의 입에서 나온 한 단어가 남자의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아이는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두 사람 사이에서 담배 불씨만큼의 따스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빠가 빵에 있는 사이에 엄마가 이혼 서류 법원에 접수시켰대."

"니 애미가? 내 허락도 없이? 니 애미 바람났냐?"

"아무튼 이제 집에 오지 않아도 된대."

"이 망할 년이."


남자의 욕설에도 여자아이는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남자가 지칭하는 욕의 대상은 딸을 향한 것이 아니었지만, 여자아이는 설령 그 대상이 자신이었어도 아무렇지 않았을 법한 평범한 반응을 보였다.


"아, 그리고 영숙이네 엄마가 영숙이 애 지우고 수녀원에 넣었어."

"영숙이랑 나는 사랑하는 사이야. 니들이 뭔데 수녀원에 넣고 말고를 결정해."

"아, 몰라. 그리고 엄마가 합의금 천만 원인가 냈다고. 그거 이번 달까지 안 갚으면 소송 걸겠대."

"니 애미는 사탄이야! 사탄!"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지며 여자아이를 향해 소리 질렀다. 남자는 방금 불 붙인 담배처럼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그 사이에 여자아이는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듣기 불편한 지 드디어 자리를 피했다. 그가 지나가면서 곁눈질로 스쿠터를 보자 핸들 부분에 큰 자물쇠가 걸어져 있었다. 몇 번 자르려고 시도했는지 톱날 자국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스쿠터에 타고 있던 남자아이는 실실 웃으며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묵묵히 걸어가는 그의 뒤에서는 여전히 남자와 여자아이의 대화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 놈은 왜 인사 안 하냐."

"뭐래? 아빠가 뭔데 상관이야."

"니들 콘돔은 쓰냐? 내 꼴 나기 싫으면 꼭 써라."


그들의 대화가 덩어리에서 티끌이 될 때까지. 티끌에서 풍경이 될 때까지. 그는 교도소 출구를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그러자 어느새 사방에는 눈이 내리는 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듯 하얀 풍경 속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는 멈춰 서서 쌓여가는 눈을 바라봤다. 이대로 가만히 서있으면 머리끝까지 눈으로 가득 차오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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