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루동안 아기엄마에게 일어난 비극

박성원 작가의 <하루>를 읽고

by 황만복
스포주의.jpg
아기엄마.jpg 박성원 작가의 <하루>, 문학과 지성사, 2012


하루를 일로 계산하면 1일. 시간으로 계산하면 24시간. 분으로 계산하면 1,440분. 초로 계산하면 86,400초다. 누구나 하루가 공평하게 주어져 있다고 하지만, 각자의 하루를 자세히 보면 결코 같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사람을 살리고, 반대로 누군가는 사람을 해치고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하루가 있듯이 박성원 작가의 <하루>에 등장하는 사람들 역시, 지금 누구보다 특별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단 하루동안 아기와 아기엄마에게 일어난 비극을 보면, 결코 신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하루를 제공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의 하루는 마치 누군가가 미리 설계한 것처럼 수많은 함정이 설치되어 있다.



Man Proposes, God Disposes

모두가 바쁜 연말,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도로 위의 사정은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각자의 바쁜 일상으로 정체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기엄마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며칠 째 아기의 열이 내리지 않았다. 오늘은 반드시 병원에 데려가야만 했다. 진작 병원에 데려갔다면 이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그녀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 마찬가지로 도로 위의 운전자들도 그녀의 사정을 결코 알 리 없었다.


이윽고 간선도로에 갇혀버린 아기엄마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연말이라 은행은 영업마감을 일찍 준비하고 있었고, 주차장에는 차들이 빼곡히 주차되어 있었다. 잠깐 은행만 들른 후, 곧장 아이를 병원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의 계획일 뿐, 신은 그녀의 뜻대로 이루어주지 않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덩그러니 아기만 남은 자동차에 한 사람이 다가왔다. 주차단속요원이었다. 그는 불법주차된 아기엄마의 차에 견인고지서를 붙였다. 주차단속요원은 차에 아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게 선팅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이번에는 한 아이가 다가왔다. 낯선 차에 붙어있는 종이는 난독증 있는 아이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 충분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차가 견인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아무도 하루동안 열병을 앓고 있는 갓난아기를 볼 수 없었다. 결코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단지 모두 부지런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이다. 얼마 후, 거리 한복판에는 한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에게 도와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기엄마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 바쁜 연말에 다른 사람의 하루까지 살필 여유가 아무도 없었다.



단 하루동안 아기엄마에게 일어난 비극

아기엄마가 간신히 차량견인소에 도착했을 때, 아기는 이미 차 안에서 죽어있었다. 내부가 보이지 않을 만큼 선팅을 짙게 하고, 며칠 동안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아기를 홀로 차 안에 두고 간 그녀가 감당해야 할 무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또한 견인고지서를 가져간 아이, 차량 내부를 살피지 않고 견인한 기사 등 다양한 인물의 서사는 그녀의 선택과 합쳐져 결국 아기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만들어냈다.


이 비극적인 일은 고구마를 먹은 듯 그저 답답할 뿐이다. 분명 아기는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 이 끔찍한 일을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충분히 있었다. 그래서 비참하다. 그러나 더 비통한 것은 단 하루동안 일어난 이 사건이 단순히 운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비극은 아기엄마의 인생에 셀 수 없이 많은 고통의 날들을 피워낼 것이다.



인생은 하루동안 일어난 일로 변화한다

우리는 때때로 비참한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우리는 기적이 나타나길 기도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반전이나 기적은 흔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기적이다. 우리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은 경험했던 하루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p.10)


간선도로에 갇힌 하루. 은행이 일찍 마감한 날. 차가 견인된 날. 아이를 가슴에 묻은 날 등 하루동안 일어난 사건들은 스스로에게 시련이면서, 누군가를 이해하는 공감, 동시에 세상을 깨닫는 경험이 될 뿐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어느 외국 소설의 광고 카피 문구처럼.

매거진의 이전글한국어를 영어로 바꾸자는 요즘 양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