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출근한 뒤에서야 비로소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누워있고 싶었지만 참을 수 없는 허기짐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습관처럼 냄비에 물을 올리고, 찬장에서 라면 두 개를 꺼냈다. 아무래도 뭔가 부실한 것 같다. 냉장고에서 계란 한 개를 꺼내 싱크대 위에 올려두었다.
물을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전자담배를 입에 물었다. 베란다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찬바람이 으슬으슬 몸을 떨게 했다. 기관차처럼 수증기를 내뿜으며 베란다로 향했다. 베란다 창에 비친 나는 팬티 한 장만 거친 타잔 같았다. 아아아- 나는 이 도시의 타잔이다.
밖에는 곧 눈이 쏟아질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떠난 아파트 단지는 고요했다. 이 시간에 집에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노인뿐이다. 심지어 아이들조차 아침 일찍 학교나 유치원으로 향한다. 그러나 나는 몸이 불편하지도, 노인이지도, 아이도 아니었다. 그냥 백수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계약직이었으나 계약기간이 종료되면서 또다시 타잔으로 돌아왔다. 맞다. 사실 타잔도 백수다.
계란 노른자는 라면 두 개사이를 가로지르는 태양 같았다. 햇반 하나까지 국물에 말아먹고 나서야 허기짐이 사라졌다. 설거지를 몇 시간 뒤 나에게 맡긴 채 지저분한 냄비를 싱크대 위에 그대로 올려두었다. 그리고 마치 눈토끼가 굴로 향하듯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이불속에서 핸드폰을 가로로 들었다. 쓸데없는 짧은 동영상들이 쓸모없는 뇌로 거듭나는 중이다. 그리고 얼마 지났을까. 다시 잠이 들었다.
- 달려! 이 쓸모없는 놈아!
고함소리와 함께 내 위에 올라탄 기수가 내 엉덩이를 채찍으로 내리쳤다. 눈물이 쏙 나올 만큼 고통스러웠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펴보니 주둥이에 하얀 거품을 뿜는 미친 말들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여긴 어디야. 어리둥절 주위를 살피는 나와 달리 다른 말들은 오직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나의 걸음이 느려지자 내 위를 올라탄 여자기수가 다시 한번 고함과 함께 채찍을 휘둘렀다.
- 밥이나 축내지 말고 달리라고!
채찍일까. 고함일까. 고함 속에 담긴 불경한 내용일까. 아- 화가 난다. 그럼에도 기수의 목소리는 익숙하게 느꼈다. 맞다. 분명 아침 일찍 나갔던 아내의 목소리와 닮았다.
아직 화를 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다리 쪽을 향했다. 인스턴트의 도움으로 키운 소시지 같은 토실토실한 다리 대신, 잔뜩 화가 난 듯 튀어나온 핏줄과 근육으로 이루어진 말다리가 보였다. 뭐야. 내가 말이 된 것일까. 일하지 않고 먹고자기만 했던 게으른 한 아이의 슬픈 이야기가 떠올랐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자 소가 되었다는 배추도사 무도사 옛날이야기. 뭐야, 이게 사실이었어?
나는 멈추고 싶었지만 발이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 걸음은 다른 말들에 비해 훨씬 느렸다. 결국 반바퀴 이상 뒤쳐지며 결승선을 힘겹게 통과했다. 숨도 고를 틈도 없이 거친 숨을 쉬고 있는 동안, 여자기수는 한 사내를 바라보며 무심한 손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사내는 긴 장검을 들고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사소한 일인 양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내 목에 칼을 겨눴다. 금방이라도 칼을 내리칠 참이었다. 안돼! 도망쳐야 돼. 달음질치려고 하지만 나를 묶어놓은 줄은 강철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살려줘. 내가 두려움에 떠는 동안 여자기수는 매몰찬 눈빛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 집에서 노는 동안 빨래 좀 하라니까.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켜 눈을 번쩍 떠보니, 퇴근한 아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등줄기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고 거친 숨은 심장박동의 비트를 따라 요동쳤다. 아내에게 악몽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떼려 했지만 아내는 나를 보며 한심하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아 눈만 꿈뻑꿈뻑 뜨고 있는 나를 보며 아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싱크대로 향했다. 아내가 냄비에 말라붙은 것들을 수세미로 바락바락 닦아 내는 동안 나는 미친 말에서 사람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옛날이야기에 나온 그 아이는 소에서 다시 사람이 될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깨달음. 교훈. 아니다. 처음에는 분명 공포였다. 생각이 정리될수록 왠지 모르게 화가 밀려왔다. 아내를 닮은 여자기수의 채찍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여자기수를 닮은 아내의 빨래타령 때문이었을까. 아- 진짜 화가 난다.
달린다
멈추지 않는다
아니 이미 나를 잊었다
성난 말은 뜨거운 입김을 내뱉고
쓴 거품들이 주둥이에서 새어 나온다
어쩌면 한 번쯤 죽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어쩌면 한 번쯤 외양간을 부수고 뛰쳐나가도 될 것 같은
그러면서도 한줄기 눈물이 땀과 뒤섞이면서
중력은 이 혼합체로 눈을 멀게 하고
진실을 사칭하는 거짓으로
고삐도 없이
달린다
_ 황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