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책을 읽고 난 뒤로 매일 벌레 나오는 꿈을 꿔
불과 두 달 전. 친구는 만날 때마다 벌레 이야기를 했다. 당구, 게임, 여자이야기만 주야장천 하던 놈이 갑자기 벌레타령이라니. 과 내에서 누구보다 인기 많고 활발했던 그가 단지 책 한 권 때문에 이렇게 변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무슨 책을 읽었길래 이러나 싶어 물었더니, 어느 날 주인공이 벌레로 변해버리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졸업식 전 마지막 방학을 맞이할 때까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항상 방학이 끝나질 않길 바랐지만, 이번 겨울방학만큼은 달랐다. 그의 소식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이-잉. 그러던 어느 날, 핸드폰이 요란하게 몸을 떨었다. 화면을 보니 방학 내내 기다리던 전화였다. 나는 수화기를 들자마자 아무렇지 않은 듯, 평소처럼 상스러운 인사말로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이름으로 걸려온 그 전화는 친구가 아니었다. 그의 부모님이었다.
그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믿기 힘든 소식을 전했다. 친구가 죽었다는 것이다. 나는 단번에 그럴 리 없다고 소리 지를 뻔했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 내내,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릴 때까지. 나는 단 하나의 현실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멍청해 보이는 사진에서 당장이라도 그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채 8차선 도로를 뛰어들었다니. 아무래도 모든 것이 그 책에서 시작된 것 같다.
나는 졸업식도 뒤로 미루고 학교 도서관부터 샅샅이 뒤졌다. 평소 이렇게라도 책을 찾았다면 어땠을까. 졸업 후 무엇을 할지 조금 고민이 줄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취업도 스펙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친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고 싶다. 그러나 도서관을 쥐 잡듯이 찾아봤지만 그 책은 어디에도 없었다.
도서관을 나가자 오랜만에 후배들을 만났다. 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불과 몇 달 전에 과잠바를 같이 맞춰 입고, 밤이건 새벽이건 잔디밭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사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를 만난 것처럼 나를 보며 서먹해했다. 섭섭함을 겨우 누르고 책에 대해 묻자, 후배들은 그런 책은 들어본 적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졸업한 선배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다들 성적순대로 잘 살 줄 알았더니 막상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성적보다 어떤 명함을 들고 있는지 중요했다. 대부분 선배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급하게 전화를 끊었지만, 단서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흥미롭게도 단서를 제공한 사람은 과탑도, 대기업에 다니는 선배도 아니었다. 지금도 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취업도 안 했다는 이름 모를 선배였다.
- 나도 본 적 있어. 김교수를 찾아가 봐.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곧장 김교수에게 향했다. 다행히 아직 연구실에 있는 듯했다. 문 앞에서 노크하려고 손을 들자 잠시 망설여졌다. 아직 취업도 못한 졸업생이 교수를 찾아온다면 과연 반갑게 맞이해 줄까. 그러나 친구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교수는 의외로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오히려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 자네가 찾는 책이 이것일 거야.
교수가 건넨 책은 법전처럼 두껍고 무거웠다. 펼쳐보니 지루한 문학사 관련 내용만 가득했을 뿐, 친구가 말하던 벌레이야기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골동품을 감정하듯 책을 이리저리 둘러보자 책머리에 낯익은 이름이 적혀있었다. 바로 눈앞에 서있는 교수 이름이었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자 교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 이 책은 내가 자네 나이였을 때 공부했던 책이야. 그 친구가 내 방에서 발견하고 빌려갔지.
교수는 한 페이지를 손수 펼쳐 보여주었다. 빼곡히 적힌 이론 밑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시 한 편이 있었다. 교수는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시를 옮겨 적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를 모두 읽고 나서야 비로소 친구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친구가 죽은 이유는 책도, 시도 아니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왔다.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교수를 뒤로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나는 캠퍼스 잔디밭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리고 고요한 하늘 위로 친구가 남긴 말들을 헤아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어지러움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쯤이면 학생과 교수가 캠퍼스를 가득 채울 시간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사람들은 모두 온데간데없이 벌레들이 줄을 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문득, 친구가 겨울방학 전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 벌레 나오는 꿈 말이야. 사실 그 벌레의 얼굴이 너였어.
시계가 도망친다. 한 마리의 벌레로 교실로 들어선다. 형광등 주위의 불빛이 나를 유혹한다. 목을 세게 조이려고. 나를 보며 환히 웃는다. 날카로운 가시로 나를 찌르려고. 교탁 위에서도 벌레가 있다. 안경 쓰고 양복을 차려입은 말 많은 벌레. 50여분 동안 지 얘기만 한다. 듣는 값을 거하게 치른 벌레가 술을 마신다. 모란꽃, 할미꽃, 장미꽃 꿀 빨듯 술을 마시며 다른 벌레를 욕한다. 벌레는 벌레답게 욕먹고 배불러 죽고, 다른 벌레는 벌레답게 술 먹고 배 터져 죽고, 우리가 죽으면 세상이 뒤집히겠지. 아니, 너 벌레잖아. 온몸을 휴지로 감싸 11시 43분. 사망하셨습니다. 말과 함께 불타는 쓰레기통에 처넣는다. 우리는 벌레라서 소리 하나 못 내고 산다.
_ 황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