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8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어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아마 딸일 것이다. 지금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의자에 앉아서 전화를 걸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마중이 늦은 나에게 잔소리를 하기 위해서겠지. 또 한 번 생각이 들지만 나는 정말 아빠 자격이 없다. 딸이 귀국하는 날조차 늦고 말다니. 어제 새벽까지 야근했다는 변명 같지도 않은 이유를 습관처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몇 년 전 아내와 이혼했다. 회사일에 미쳐 살다 보니 결국이 가정이 버텨내지 못했다. 전처는 담담하게 이혼을 요구했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이혼 후 태국으로 떠났고, 딸아이는 내가 키우게 되었다. 못난 아빠로서 딸에게 미안했다. 그럼에도 딸은 기특할 만큼 씩씩하게 자랐다. 단둘이 지내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언젠가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다는 꿈도 꾸었다.
며칠 전 딸은 방학을 맞이해서 전처를 만나러 태국으로 갔다. 딸은 혼자 남겨진 내가 외로울까 봐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보냈다. 사진 속에서 딸은 행복한 듯 웃고 있었다. 그리고 전처도 예전에 비해 훨씬 밝아보였다. 최근에는 새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들었다.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릿했지만,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행복해져야 할 사람을 그동안 새장에 가두고 괴롭힌 건 나였으니까.
딸은 일주일 동안 맛있는 것도 먹고, 오랫동안 못 본 엄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온다. 딸이 없는 일주일 동안 나는 계속 생각했다. 지금껏 가족을 위해서 일한 줄 알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았다. 오로지 나의 만족을 위해서 일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일주일 동안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서면서 깨달았다. 하지만 뒤늦은 깨달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전히 전화벨은 멈추지 않고 울렸다. 운전 중이기도 했고, 왠지 딸에게 크게 혼이 날까 겁이 났다. 하지만 조금 늦더라도 안전하게 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딸을 만나면 무엇을 먹으러 갈까. 맞다. 떡볶이를 좋아했었지. 아니면 요즘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마라탕을 먹으러 갈까. 후식으로 탕후루. 근데 그건 치아에 안 좋을 것 같은데.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밤새 야근 때문일까. 하품이 나왔다. 졸음이 밀려오는 듯해서 라디오를 켰다. 그런데 DJ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늘 밝고 경쾌하던 사람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고 진지했다. 이 시간쯤이면 늘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오던 프로그램에서, DJ는 노래도 틀지 않고 무겁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볼륨을 높여 그의 말을 더 똑똑히 들었다.
- 다시 말씀드립니다. 속보입니다. 오늘 오후...
또 무슨 사고가 난 걸까. 매일같이 듣는 교통사고 뉴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품이 한 번 더 나오자, 라디오 채널을 돌리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때 DJ가 조심스레 내뱉는 하나하나가 마음속에서 뭔가 불러왔다. 익숙한 지명, 익숙한 시간대, 그리고... 익숙한 항공편 번호.
에이, 설마... 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운전대를 더 강하게 잡았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어느새 한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고 있었다. 시간이 초 단위로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절망의 파도가 오늘은 물론, 내일까지 이미 삼켜버린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그러자 핸드폰은 낯선 전화번호를 띄우며,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문득 걸려온 전화
수화기 너머로 절망의 꽃이 피어있다
겁쟁이는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따뜻하게 내리던 함박눈은
의미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이
스쳐가는 바람을 따라 그저 흔들릴 뿐이다
베인 상처에 맺히는 핏방울들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오래된 원두커피 같을 때
들려오는 노래들은 온통 가사들뿐이라
나도 모르게 쥐고 있던 핸들을 놓아버린다
죽음마저 나를 외면하는지
도로 위에 스러져 민들레 꽃 한 송이로 남는다
_ 황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