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작가의 <변희봉>을 읽고
변희봉은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배우다. 그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관객을 몰입하게 만드는 배우다. <괴물>, <공공의 적 2>, <선생 김봉두>, <더 게임> 등에서 그는 학교 이사장, 한글을 배우는 노인, 모자란 아들을 둔 아버지 등 때때로 그는 배우가 아니라 극 중 실제인물처럼 보였다. 그는 어떤 특정한 색으로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다채롭고 깊은 연기를 선보였다. 그랬던 그가 이장욱 작가의 단편소설 <변희봉>에 등장했다.
소설은 술에 취한 만기가 지하철역을 내려가다 '변희봉'을 마주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익숙한 얼굴에 넙죽 절까지 하는 만기. 그 후 만기는 시장에서 생선을 팔고 있는 변희봉을 만난다. 그러나 만기 외에는 아무도 변희봉을 몰랐다. 이 소설세계에서 '변희봉'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기는 변희봉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만기의 아버지가 만기에게 "변희봉을 알고 있냐"라고 물으며 소설이 마무리된다.
나는 이 소설 속 변희봉이 '아버지'를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술에 취해 휘청이는 사람, 지하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사람. 우리의 일상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아버지들의 모습을 변희봉이라는 인물로 응축되어 있다. 실제로 배우 변희봉이 주연보다 극을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역할을 연기하듯이, 이 세상의 아버지들 역시 자식이라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묵묵히 떠받치는 '숨겨진 주연'이다.
그렇다면 왜 소설 속 사람들은 변희봉을 볼 수 없었을까. 나는 그 이유를 부성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부성애를 쉽게 볼 수 있지만, 실생활에서 인식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감사나 미안함처럼 명확한 감정과 달리, 부성애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어려운 감정이다. 단순히 아버지가 베푸는 사랑이 아니다. 비이성적, 비합리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이성적, 합리적인 사랑이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자식부터 먼저 구하려는 아버지의 선택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모성애와 부성애는 위대하는 것 외에는 설명할 말이 없다. 따라서 자식과 아버지 사이가 아닌 소설 속 인물들에게 변희봉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부성애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공부 때문에, 회사 때문에, 사랑 때문에. 그러다 어느 순간, 아버지가 나의 세상에서 점점 멀어지거나,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의 헌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어릴 적 아버지의 손을 주무르던 내 손이 어느새 그분의 손과 닮아가고, 만기는 물론, 우리도 언젠가 결국 누군가의 변희봉이 될 것이다.
부성애란 내 이야기가 아니라 자식의 이야기를 떠받치는 일이다. 그리고 맨 앞에서 수많은 파도를 온몸으로 맞서 자식의 배를 먼바다로 띄우는 일이다. 언젠가 우리도 먼바다로 순항 중인 자식의 배를 바라보며 회한에 젖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비로소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내 세상을 버티고 있었는지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까.
사실 이 글은 15년 전쯤 썼던 서평을 다시 다듬은 것이다. 그때의 나는 아버지가 얼마나 위대한지, 또 얼마나 힘들게 나를 이끌어왔는지 잘 몰랐다. 그저 언제나 큰 산처럼 든든하게 서있고, 나에게 큰 그늘을 내려주는 나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역시 40대를 바라보면서 아버지도 한 그루의 나무였음을. 비가 오면 젖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며, 눈이 오면 떨린다는 것을 알았다.
변희봉 배우가 별이 된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이 역할을 선생님이 하셨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위대한 연기를 보여준 그의 부재는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다. <옥자>로 칸 영화제에 초청받았던 선생님은 인터뷰에서 '70도 기운 고목나무에 꽃이 핀 기분'이라고 말씀하셨다. 배우 변희봉, 그가 관객들의 가슴에 피워낸 수많은 꽃들이 지금 대한민국을 향기롭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