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온 종달새 편지(7.7.목. 시詩에 대하여)

진솔한 눈으로 보고 담백하게 표현하기 / 헤르만 헤세 '시에 대하여'..

장마철답게...

비가 많이 내립니다...

그 빗소리의 장중함에...

숙연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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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찬 빗소리가...

모든 것을 압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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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존재의 미약함을 느끼며...

자연에 대한 경외감마저 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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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번개가 칠 때면...

더욱 외소함을 느끼게 됩니다...



시(詩)에 대하여 -헤르만 헤세


열 살 적 어느 날 읽기 수업시간에 시를 한 편 읽었는데, 제목이 <슈펙바흐의 아들>이었던 것 같다.

어느 소년에 관한 시였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 한가운데서 같이 싸우며 어른들에게 포탄을 날라줬다나 어쨌다나,

아무튼 무슨 영웅적인 행동을 한 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남자애들은 그 시에 푹 빠졌다.

나중에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약간 반어적인 어투로 "이게 좋은 시냐"고 물으시자,

우리 모두 우렁차게 "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시면서,

"아니야, 이건 좋은 시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 말씀이 옳았다.

그 시는 우리 시대 예술의 법칙과 취향에 맞지 않았고 고상하지도 진실하지도 않은 졸작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사내녀석들은 엄청난 감동의 물결에 사로잡혔더랬다.

십 년이 지나 스무살이 되자,

나는 그 어떤 시든지 한 번만 읽어 보면 좋은 시인지 나쁜 시인지 주저 없이 말할 자신이 있었다.

그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한 번 쓱 읽고 두 행쯤 읊조려보면 바로 답이 나왔다.


그 후로 다시 수십 년이 흘렀고 참으로 많은 시들이 내 손과 발을 거쳐갔지만,

요즘 들어 누가 나에게 시를 하나 보여주며 평가를 부탁하면 전혀 갈피를 못 잡겠다.

내게 시를 보이는 사람이 많은데, 대개가 '평'을 받아 출판사 문을 두드려보려는 젊은이들이다.

이 젊은 시인들은, 나이 많은 내가 당연히 노련한 줄로 믿었다가

그러기는 커녕 우유부단하게 이 시 저 시 뒤적이다 평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어이없어하며 실망한다.

스무 살 적이었으면 자신만만하게 2분 내로 해치웠을 일이건만 이제는 이만저만 어려운게 아니다.

아니, 도저히 못하겠다.

이 '노련미'란 놈도 젊었을 적엔 그냥 저절로 생기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더란 말이다.

노련미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타고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학창 시절부터

일찍이 노련미를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도록 아예 감조차 잡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내가 바로 그런 부류에 든다.


스무 살 적의 내가 시를 그토록 칼같이 판단할 수 있었던 근거는,

당시 특정 시와 시인들을 거의 배타적이다시피 강하게 선호해서 어떤 책이나 시를 대하건

곧바로 이들과 비교했기 때문이다.

이들과 유사하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별 볼일 없는 거였다.


물론 지금도 내가 각별히 좋아하는 시인들이 있고, 그중 몇몇은 옛날부터 쭉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시인들을 곧바로 떠올리게 하는 그런 시들이야말로 제일 수상쩍게 본다.


어쨌든 시와 시인 일반에 대해서가 아니라 '형편없는' 시들,

다시말해 시를 쓴 본인 외에는 누가 보더라도 그저 그렇고 변변찮으며 없어도

그만인 그런 시들에 대해서만 얘기하겠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그런 시들을 적잖이 읽어왔고,

예전에는 이 시들이 형편없다는걸 분명히 알았으며 어째서 형편없는지 그 이유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이 없다.

습관이나 지식이 다 그렇듯이, 이러한 확신과 지식마저도 어느날 갑자기 아주 불확실하게 비쳐졌던 것이다. 어느 순간인가 갑자기 진부하고 무미건조하고 공허하게 느껴졌고,

허점투성이였고 마음속에서 거부감이 일었다.

결국은 살아 있는 오늘의 지식이 아닌 과거의 구태의연함일 뿐이니,

심지어 예전에 왜 거기에 가치를 두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이제는 가끔 어느 정도냐 하면 의심할 여지없이 '형편없는'

시들을 인정하고 나중에 칭찬해줄 마음이 동하고, 반면에 훌륭하고, 최고의 시들이 종종 미심쩍어지곤 한다.


이는 때로 교수나 공무원 혹은 광인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매한가지다.

일반적으로 교수나 공무원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 하면 흠 잡을 데 없는 시민이요

확실하고 유용한 사회구성원이라고 본다.

반면 미친 사람이라면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고 불행한 환자여서,

인내와 동정의 대상일 뿐 아무 쓸모없는 존재임을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살다 보면 다만 몇 시간 정도라도, 이를테면 교수나 광인을 특별히 많이 상대했다든가 하고 나면,

불현듯 그 생각이 뒤집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광인이야말로 평화와 자족의 기쁨을 누리는 행복한 사람, 지혜로운 인간, 신의 사랑을 입은 자,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개성 만점의 존재로 느껴진다.

그에 비하면 교수나 공무원이란 그저 평범한 성격에 개성도 특색도 없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인물 같다.


때때로 '형편없는' 시들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든다.

불현듯 그 시들이 전혀 형편없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독특한 향기가, 개성이, 천진함이 마음에 와 닿고, 명백히 결점이자 약점으로 지적될 요소가

너무나도 감동적이고 독창적이며 사랑스럽고 매혹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가 보통 애호하는 더없이 아름다운 시들은 오히려 좀 밋밋하고 따분해 보이는 것이다.


특히 표현주의 사조가 널리 퍼지면서 여러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볼 때 그렇다.

대체로 그들이 짓는 시는 전혀 '훌륭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그들은, 아름다운 시는 세상에 차고 넘치며 끊임없이 예쁜 시들을 써내면서 앞세대가 시작한

이 인내력 게임을 계속하고자 이 세상에 태어난 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그들은 전적으로 옳은 것 같다.

그리고 때로 이들의 시는 '형편없는' 시들만이 갖고 있는 바로 그 독특한 감동을 전해주기도 한다.


그 이유를 찾자면 사실 단순하다.

한 편의 시가 탄생하는 기원에는 너무나 명백한 뜻이 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영혼이 자신의 체험과 격동을 또렷이 의식하고자 또는 스스로를 방어하고자

내뿜는 분출이요, 외침·아우성·탄식·몸짓·반응이다.

이와 같은 일차적이고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기능 면에서 따지자면,

어떤 시도 판단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우선은 시인 자신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는 시인의 호흡, 그의 아우성, 그의 꿈, 그의 미소, 그의 주먹질이다.

그 어느 누가 간밤에 꾼 꿈을 두고 미학적 가치를 논하며,

우리의 손짓과 고갯짓, 몸짓과 걸음걸이를 두고 그 합목적성을 따질 수 있겠는가?

손가락 발가락을 입에 물고 사는 갓난아기를 펜대 굴리는 작가나 날개 활짝 편 공작새에 비해

어리석고 부족하다 할 수 있겠는가?

이들 중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고, 누가 더 옳고 누구는 못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때로 어떤 시는 시인 자신의 내면을 토로하여 이완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타인의 마음까지 움직이고

기쁨과 감동을 선사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아름답다고 하는 시란 바로 그런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고 공감할 만한 것이 시에 표현된 경우이리라.

하지만 이것도 결코 확실하지는 않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악순환이 시작된다.

'아름다운'시를 쓴 시인이 사랑받으니까, 자꾸 그런 류의 시들이 양산되는 것이다.

즉 시의 근원적·원초적·치유적 기능과는 동떨어진 채 오로지 아름다우려고만 한다.

이런 시들은 애초부터 타인, 즉 청자와 독자를 경냥해 쓰인다.

이들은 더 이상 한 영혼의 꿈, 춤사위, 절규가 아니며,

체험에 대한 반응도 더듬더듬 읊조리는 소망이나 마법의 조문도 아니며,

현자의 몸짓도 광인의 기행도 아니다.

다만 뚜렷한 목적하에 만들어낸 생산품,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 대중의 입맛에 맞춘 사탕과자에 불과하다. 유포되고 팔려나가고 구매자에게 행복감이나 기쁨을 선사하거나

심심풀이가 돼주기 위해 만들어진 상품인 것이다.

바로 이런 시들이 대중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는다.

진지하게 애정을 쏟으며 몰입 할 필요도, 괴로워하거나 마음이 흔들리거나 하는 일도 없이,

그저 곱고 정연한 리듬에 몸을 맡겨 편안하고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시 말이다.


이러한 '아름다운'시들이 가끔 너무나 지겹고 미심쩍어지니다.

마치 길들여지고 다듬어진 모든 것들처럼, 교수들과 공무원들 처럼 말이다.

그리고 때때로 자로 잰 듯 정확한 세상에 진절머리가 날 때면,

가로등을 박살내고 사원에 불을 놓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런 날이면 이 '아름다운'시들은 저 신성한 시성들의 것에 이르기까지

죄다 어느 정도는 마치 검열을 거친 듯,거세된 듯, 지나치게 지당하고 유순하며 고루하게 느껴진다.

그럴 땐 '형편없는'시에 마음이 끌린다.

그때는 어떤 것도 전혀 형편없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환멸은 도사리고 있다.

형편없는 시를 읽는 것은 극도로 수명이 짦은 즐거움이니, 금세 물리고 만다.

그러면 굳이 읽으라는 법 있나?

누구나 스스로 형편없는 시를 지어보면 안될까?

그렇게 해보라.

그러면 곧 알게 되리라.

최고로 아름다운 시를 읽는 것 보다 형편없는 시를 짓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1918)

출처: http://cafe.daum.net/ansgkrtkffhd/af4y/4?q=%BD%C3%BF%A1%20%B4%EB%C7%CF%BF%A9

(북카페 산새 문학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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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떠나는 것이고 만나는 것'이라고 했듯이...

떠나와서...

자기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도 되고...

새로움과 만나면서...

인연이 형성되기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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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역사보다 더 진실하다'고 했듯이...

좋은 시를 읽으며...

삶을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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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님의 '낙타'...

2008년 창비시선 28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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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님의 '이사'...

2004년 창비시선 23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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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님의 '고목을 보며'...

2008년 창비시선 284에서...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시(詩)도...

삶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진솔된 눈으로 보고...

담백한 필치로 표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적을 가졌다는 것은...

그리 순순해 보이지 않지요...


'진솔함'과 '담백함'...

우리 삶에서도...

참으로 중요한 말이겠다 싶습니다...


진솔된 사람...

담백한 음식...

진솔되고 담백한 삶...

우리가 지향해야 될 가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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