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온 종달새 편지(3.26.토. 단풍나무 수액과 동고비)
내가 행복한 이면에(단풍나무와 동고비 이야기)
어느 작은 계곡 산림욕장을 들어서면
물길 옆 도로변에 단풍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습니다.
4계절마다 풍모를 바꿔가며 '신의 애쓰신 증거'를 잘 보여주고 있지요.
봄이면 새싹이 움터나와 연초록으로 신비감을 더하고
여름이면 울울창창 무성한 푸르른 잎으로 풍성함을 더하고
가을이면 눈이 시리도록 단풍빛으로 물들어 화사함을 더하고
겨울이면 처연한 나목으로 철학적 운치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줄지어선 단풍나무들중에 특별히 눈에 돋보이는 나무가 있군요.
다른 나무보다 양지바르고 물길도 가까워 좋은 조건을 차지하고 있는 이 나무는
수형도 멋스러워 주변의 단풍나무에 견주어 단연 으뜸으로 보입니다.
지난 여름은 열정적이었지요.
작렬하는 태양아래 풍성하게 잎을 달고 저마다 열심으로 목질을 튼실하게 부풀리며
나무의 미래인 '겨울눈'을 키워왔습니다.
으뜸인 단풍나무도 타고난 형질과 복받은 터전으로 말미암아 무럭무럭 나무의 소임을 다했지요.
'나의 행복 이면에 늘 누군가의 순고한 희생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으뜸 단풍나무가 웃자람을 하면 할수록 옆의 다른 단풍나무들은
기세에 눌려 자람을 제대로 할 수 없었지요.
웃자란 옆가지가 구역을 넘어와 가지 뻗음을 방해하니
으뜸 단풍나무가 서있는 반대쪽으로 가지를 뻗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수형이 기웃해져 갔습니다.
더욱이 비바람 부는 날이면 무성한 으뜸 단풍나무의 가지와 잎사귀가
마구 요란을 부려 옆의 단풍나무 가지와 잎사귀에 상처를 주곤 했지요.
그래도 단풍나무들 세계의 으뜸나무가 내 옆에서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란다는 것이
작은 행복이어서 아픔과 불편함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가을은 참으로 훌륭하여
울긋불긋 열정적으로 시적이었으며 철학적이었지요.
감탄을 자아내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면 단풍나무로서의 자부심과 함께
우리 단풍의 아름다움에 희열을 느끼곤 했습니다.
더욱이
으뜸 단풍나무는 여름에는 넓고 시원한 그늘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더니
가을 단풍으로 큰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지요.
그래서 모두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함께 맞이한 겨울
그 사랑받던 찬란한 단풍잎을 떨궈내기가 참으로 아쉬웠지만
지체할 수없는 숙명이었기에 모두 내려 놓았지요.
으뜸 단풍나무는 더욱 아쉬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황량한 겨울
지난 계절 정성드려 키워온 씨앗들이 비상할 준비를 하는군요.
저도 열심으로 씨앗을 많이 만들어 오늘을 대비했는데
으뜸 단풍나무는 그 풍성한 여름 잎과 현란한 가을 단풍에 몰입하느라
가지만 키웠지 튼실한 씨앗을 만드는데는 소홀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적은 씨앗이나마 비상시킬 준비를 하네요.
우리들 씨앗에는 날개가 달려있습니다.
비롯 엄마나무는 날지도 심지어 움직이지도 못하지만
우리의 미래인 나의 분신, 씨앗들에게 평생에 한번인 이 아름다운 비상을 준비시킨 것이지요.
나의 씨앗들은 멀리 날아가야 합니다.
엄마 나무로 부터 멀리 날아가서 새로운 곳에서 저마다의 삶을 개척해야 하지요.
시작은 비록 힘들겠지만 그곳이 씨앗들의 훌륭한 터전이 될 것이기에
바람에 날아오르는 저 수 많은 씨앗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독한 겨울
아픔이 이런 것이구나
참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기다림이 이런 것이구나 싶은 겨울
겨울은 누구에게나 평등했지요.
으뜸 단풍나무에게나 평범한 단풍나무에게나...
오히려 웃자란 가지 많은 으뜸 단풍나무가 겨울나기가 더 힘들었겠지 싶습니다.
그리고
봄이 왔습니다.
봄은 소리로 먼저 오지요.
계곡의 눈과 얼음 녹아 내리는 소리
봄이 왔다고 지져귀는 새소리로...
이제 나무들의 초록 레이스
뿌리의 보이지 않는 수고로움이 벌써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고이고이 귀하게 간직해온 겨울눈이 잎으로 움트고 꽃으로 피어날 준비를 하네요.
그런데
처참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산림욕장의 게으른 일꾼이 지난 가을에 했어야 할 가지치기를
생명이 움트는 이 봄에 한다고 톱이며 낫을 가지고 설치고 있군요.
저야 웃자란 가지가 별로 없었지만
내 옆의 으뜸 단풍나무는 많이 웃자란 가지로 인해 엄청난 수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웃자란 가지뿐만이 아니라 커다란 가지까지 톱으로 잘라 내었지요.
그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입니다.
으뜸 단풍나무의 소리없는 비명을 저는 기억하네요.
다음날
기세가 꺽이고 삶의 의지를 잃은 으뜸 단풍나무가 무엇인가를 흘려내고 있었습니다.
피눈물대신 아니 우리 나무들의 혈액이지요.
그 피같은 수액을 잘라진 큰 가지에서 줄줄 흘려내리는 것
나무의 삶을 포기한 듯
몇날 몇일을 그렇게 한없이 나무 줄기가 흥건하도록, 땅이 흥건하도록...
꽃샘 추위가 있던 날은
흘러내리던 수액이 얼어서 커다란 고드름으로 변하여
으뜸 단풍나무의 닫힌 차가운 마음을 드러내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몇일 후
햇살좋은 어느날
시샘은 오는 봄을 이기지 못하여
고드름이 녹아 수액으로 흘러내리던 날
고드름이 달려있던 그 큰 가지 상처에 새가 날아들었습니다.
동고비
한동안 나무 상처위에 앉아 기도하듯 하늘을 우러르다가
겨우내 굼주리고 목말랐던지
흘려내리는 수액을 열심으로 부리를 옆으로 하여 힘겹게 먹는 것이었지요.
다른 새들도 날아들었고
수액이 흘러내린 땅에도 개미며 어른 벌레로 겨울을 난 허기진 곤충들이며 많이들 모여들었습니다.
우리들은
삶의 의지를 잃고 있던 으뜸 단풍나무를 봄바람으로 깨웠지요.
"이보게! 으뜸이! 눈을 떠 보게!
자네가 지난 계절 열심으로 살아낸 그 결과물로 오늘 많은 생명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