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함보다 앙상함이 더 외경스럽다 / 숲에는 갈등이 없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한겨울...
저멀리 숲(산)을 바라봅니다...
많이 헐거워진 모습으로...
산등성이가 고슴도치 등처럼 보이는군요...
얼기설기한 둥근 참빗같기도 하고...
겨울 숲에 들어서면...
나무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수형(樹形)이 오롯이 드러나 조금은 안스러운 모습...
모두들 춥다고 두겹 세겹 껴입는데 말입니다...
살을 에이는 삭풍이라도 불어오면...
눈물이 나도록 짠하지요...
하늘을 떠받치듯 의연히 서있는 모습...
그 옛날 저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선구자같기도 하고...
겨울나무는 인고의 시간만 보내고 있는게 아닙니다...
어김없이 닥아올 봄을 대비해...
지난해부터 준비해온 나무의 미래인 소중한 ‘겨울눈’...
그 미래가 얼지않토록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뿌리는 뿌리대로...
줄기는 줄기대로...
가지는 가지대로...
에너지 소모를 극히 제한하며 모든 열정을 ‘겨울눈’에 집중하지요...
불필요하게 뻗어서 서로에게 장애가 되는 뿌리, 줄기, 가지는...
스스로 영양공급을 차단하여 절단시키는 아픔을 감내하면서 까지...
겨울나무는...
내삶만 고집하지 않습니다...
풍성했던 가을...
땅으로 내려보낸 여름날의 푸르른 결과물이 모든 숲의 요긴한 적금이 되고...
온몸으로 갖가지 날짐승 들짐승 그리고 곤충과 버섯균사까지 받아들이는...
아픔을 감내하며 놀라운 포용력과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쯤되면...
나무는 더 이상 미물의 생명체라기보다...
성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나무처럼 살고 싶다’고 했지요...
오롯이 베풀기만 하는 삶이니까요...
나무의 덕목...
덕목 하나. ‘배려와 겸손’...
한여름 가지를 뻗을 때도 주변에 다른 나무가 있나 없나를 보아...
없는 쪽으로 가지를 뻗습니다...
가을이 되면, 결실과 함께 ‘겨울을 준비하라’는 엄중함에 모든 것을...
내려 놓습니다...
그 내려놓은 것은 고스란히 숲으로 되돌아가 많은 생물들 삶의 밑거름이 되지요...
덕목 둘. ‘아낌없이 주는 나무’...
찬란한 봄의 시적 영감으로...
한여름의 그늘로...
늦가을의 결실로...
한겨울의 땔감으로도...
그리고 잘라져버린 그루터기의 쉼터로...
덕목 셋. ‘주어진 현실에서의 충실한 삶’...
하늘이 내린 형벌(움직이지 못하는 삶)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산등성이 열악한 바위틈이든, 숨쉬기 곤란하고 뿌리뻗기 어려운...
도심가 아스팔트든, 어떤 여건에서도..
싹을 틔우고 잎을 키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아무말없이...
‘나무에게도 20가지 이상의 인지능력이 있다’ (미국 식물학자 루터 버벵크)...
나목(裸木)...
당신을 보면 숙연해진다...
성하(盛夏)를 장식했던 무성한 치장을 훌훌히 벗어버리고 앙상한 피골로 영하에 몸을 맡기고 있는 당신,
무례한 눈보라가 몰아쳐도, 사나운 칼바람이 온몸을 긁어도 잔가지 부르르 떨며 오롯이 말이 없다...
무성했던 잎사귀가 당신의 옷이 아니었구나...
어기찬 동화작용이 당신의 피가 아니었구나...
우리가 한겹 두겹 옷을 껴입는 계절에 당신은 미련없는 이별에 익숙하구나...
웅크리고 오그리는 계절에 당신은 오히려 애착없이 당당하구나...
외투 자락여미며 당신 앞에 서면 한 없이 작아진다...
~(중략)...
집 평수를 늘리고 차를 바꾸고 서가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도록 책이 늘어 간다...
무수한 고지서의 공격에 통장의 빈칸은 금세 채워진다...
의미 없는 만남이 늘어나 재활용하지도 못하는 명함 조각이 늘어 간다...
부끄러운 결핍을 숨기려 넉살과 뻔뻔함이 늘어 간다...
겉치장이 속내를 은폐해줄 것을 믿고 손목과 손가락, 목에 번쩍이는 굴레가 늘어간다...
첨단 기기가 첨단 지혜인 줄 알고 덥석덥석 신제품 껴안기에 과감해진다...
서너 개씩 기기를 안으니 손과 귀가 모자란다...
무책임한 발신을 최신 정보인 양 마구 쓸어 담고 으스대며 그걸 방뇨하듯 퍼뜨린다...
동서고금을 거침없이 넘나들어야 지식인 축에 끼는 양 모호한 부호들을 무모하게 발설한다...
겨울나무 앞에 서면,
한 시절 함께한 혈육을 미련없이 보내고 제 한 몸만 오롯한 겨울나무 앞에 서면 더욱 작아진다...
영혼을 팔아 예복을 차려입지 않고 무성했던 지난날을 되새김질하지 않는다...
입은 몸이 벗은 나무 앞에서 그저 초라하다...
명품이 계급장이니 되는 것처럼 내세워 보지만 명찰도 없는 겨울나무 앞에 서면 부질없다...
그는 오직 묵언이다...
명성과 축재는 성적순이었다...
격이 다른 길을 헐레벌떡 달리며 남자는 많은 것을 얻었다...
이름을 얻고 재산을 쌓고 세련된 아내와 자랑하고파 안달 나는 자식을 얻었다...
고단수 겸손을 익히며 기막힌 처세에 진이 빠질 때쯤 그들의 낙마가 시작되었다...
~(중략)...
지금 우리가 누리는 풍요가, 누구는 꿈만 같다고 기적이라 하고 누구는 천민자본주의,
미제 식민의 잔재일 뿐이라고 한다...
고착된 가치를 수정할 기미도, 참회를 고백할 용기도 없이 분노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인 양
눈빛만 맵게 변해 간다...
주름이 늘고 머리가 굳어지고 있음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는 중에도 나무는 속살에 금을 새긴다...
나이테,
겨울을 거쳐야 수행의 이력 같은 가는 선이 속살에 새겨진다...
겨울을 모르는 나무에겐 나이테가 없다...
영하의 날씨 속에 벗은 몸으로 한철을 보내야 나이테가 새겨진다...
새겨진 나이테를 겉으로 드러내지도 과시하지도 않는다...
몸통을 잘라야 촘촘히 새겨진 인고의 시간을 알 수 있다...
겨울나무 앞에 서면 무용이 되어 가는 육신이 더욱 허전해진다...
'무소유(無所有)'를 읽고 감격하고 반성하고 무소유(無所有)를 외치지만
언제 우리가 무소유(無所有)인 적이 있는가...
방에 앉아서 바깥이 궁금하고 밖에 나가선 아랫목을 그리워 한다...
가구가 집을 점령해서 운신이 불편하다...
옷은 왜 그리 쌓이는가...
한 벌밖에 걸치지 못할 몸인데 중대 병력이 무장해도 여벌이 남는다...
책은 또 어떤가...
끝없는 지적 갈증 때문인가...
책에 치이고 책에 눌려 발 뻗기가 불편하다...
애물단지는 이런 것을 두고 부르는 이름일 터이다...
우리가 부산을 떨며 만인의 눈물로 길을 적시며 적멸(寂滅)로 향할 때, 우리 후손의 후손이 그렇게 할 때도,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대로 침묵으로 온존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의 이름이 흔적조차 없어질 때 나무도 서서히 적멸(寂滅)을 맞을 것이다...
우리 몸은 한 줌 재가 되지만 나무는 고사목 되어 벌레의 자양이 되고 집이 되고 흙의 거름이 된다...
나목(裸木)인 당신,
겨울나무 앞에 서면 무성함보다 앙상함이 더 엄숙한 걸 알 것 같다...
이우상님의 '숲에는 갈등이 없다'중에서...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춥고 외로운 분들에게...
따사한 장작불처럼...
훈훈한 온기가 깃들어...
평안한 겨울이기를...
기원합니다...
'이 새벽의 종달새' 블로그 http://blog.daum.net/hwangsh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