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2월에는 가족 여행을 한다. 올해는 남편과 아이들의 스케줄이 맞지 않아 가까운 말레이시아로 짧게 다녀올 계획을 세웠다. 호텔도 예약해 두고 여정도 미리 짜 두었는데 출발 하루 전에 딸이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남편과 아들만 여행을 떠났다. 기다리던 가족 여행을 못 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컸다.
며칠 전, 출근한 남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지난번에 다 함께 여행을 못 했으니, 싱가포르에 새로 오픈한 호텔에서 하룻밤이라도 같이 보내자고 했다. 마침 아이들도 시간이 괜찮다고 했다. 잠시 후 남편이 방 두 개를 예약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아이들과 나, 셋이서 스테이케이션(집 또는 집 근처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을 한 적은 있지만 온 가족이 함께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어서 기대되었다.
다음 날, 간단한 짐을 챙겨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싱가포르 쇼핑의 중심지인 오차드로드에 위치해 있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초록빛 식물로 장식된 전면이 눈에 띄었다. 일반적인 호텔 분위기와 달리 자연친화적이면서도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객실이 일찍 준비돼서 오후 1시쯤 체크인을 했다. 배정받은 두 객실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나에게 객실 선택권을 주었다. 나는 조금 더 넓은 객실보다 가든뷰가 좋은 객실을 선택했다. 1층 실외에는 식물멍을 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고, 2층부터는 사방을 화초로 둘러놓아 싱그럽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더 싱가포르 에디션(The Singapore EDITION) 호텔 로비
자연친화적이면서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남편과 내가 사용한 객실
가든 뷰
아이들이 사용한 객실
화장실
미니바
배낭에서 노트북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촉촉하게 내리는 비에 어울리는 잔잔한 인디 음악을 틀었다. 남편은 나 혼자만의 시간을 주려고 아이들 객실로 갔다. 혼자 침대에 편안히 기대앉아 눈에 청량한 녹색을 담았다. 마음이 포근하고 편안했다. 잠시 후 “딩동”하고 객실 벨이 울렸다. 룸서비스 직원이 크리스마스 케이크 슈톨렌을 가져왔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특별히 무료로 제공된다고 했다. 커피를 진하게 내려 케이크와 같이 먹었다. 브런치에 접속하여 한동안 못 읽은 관심 작가님들의 글을 읽고 댓글을 남겼다. 내가 댓글을 남기자마자 곧바로 답글을 써 주신 작가님들이 계셨다. 비, 음악, 글 그리고 한 번도 얼굴을 뵌 적은 없지만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글친구들과의 대화하는 시간이 정말 행복하게 느껴졌다.
슈톨렌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호텔 제일 위층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늦은 오후라서 그런지 한산했다. 간단한 안주와 맥주를 주문했다.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있으니 기분이 참 좋았다. 서로 스케줄이 다르다 보니 미리 약속하지 않으면 함께 오기 쉽지 않은데 이번에는 모두 시간이 딱 맞아 함께 올 수 있었다. 이틀 후에는 남편이 출장을 떠날 예정이고, 일주일 후에는 딸이 해외로 교환학생을 갈 예정이기 때문에 한동안 우리 가족 모두 모일 기회가 없다.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호텔 직원에게가족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루프탑
저녁을 간단히 먹고 아이들이 사용하는 객실로 갔다. 노트북과 TV를 연결했다. 평소에 아이들과 즐겨 보는 예능 프로그램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3’을 틀었다. 기안 84, 빠니보틀 그리고 내가 진짜 좋아하는 덱스, 이렇게 세 명이 펼치는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의 에피소드는 웃음과 즐거움 그 자체였다. 남편은 소파 위에 누워서, 나와 아이들은 한 침대에 꼭 붙어 누워서 봤다. 나를 중심으로 양옆에 아들과 딸이 누웠다. “엄마, 우리 엄마. 엄마 팔은 찹쌀떡처럼 말랑말랑해요.”라고 말하면서 내 팔뚝을 ‘앙앙’ 깨무는 흉내를 냈다. 열심히 운동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팔이 찹쌀떡처럼 말랑하다고 하니 그만 웃음이 나왔다. 아이들과 이불속에서 다리로 장난을 치며 TV를 시청했다.
아이들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넨 후, 남편과 함께 객실로 돌아왔다. 침대에 기대앉아 잠시 책을 읽었다. 침대가 낯설어서 그런지, 베개가 불편해서 그런지 아니면 늦은 오후에 진한 커피를 연달아 몇 잔 마셨기 때문인지 몰라도 불을 끄고 누웠는데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늦은 밤에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다. 아이들을 깨워 호텔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아침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니 정말 편했다. 보통 간단한 아침을 준비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골고루 준비하다 보면 시간이 걸리는데 호텔에서는 내 수고 없이 밥을 먹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메인 메뉴는 메뉴판을 보고 주문해야 했고, 샐러드와 디저트류는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어서 자유로이 갖다 먹을 수 있었다. 음식을 쭉 차려 놓는 뷔페식보다 이렇게 서빙되면 음식낭비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아 좋았다.
조식: 메인 요리는 테이블에서 주문하고, 샐러드와 디저트류는 뷔페식으로 차려져 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는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정원 산책,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 게임, 낮잠 등 각자가 원하는 일을 하며 자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나는 사이버대학교에서 수강 중인 강의를 들었다. 정규 학기는 14주 동안 진행되지만, 계절학기는 한 달 동안 14주 강의를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수강해야 한다. 동영상 속도를 1.2배속으로 해서 집중해서 강의를 들었다. 수업을 들은 후 아이들 객실로 갔다. 아이들은 컴퓨터 코딩 관련된 문제를 함께 푸는 중이었다. 딸은 최근에 코딩에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어서 오빠에게 배우고 있는데, 오빠가 잘한다고 칭찬해 줬는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이들이 서로 우애 있게 잘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점심 무렵 체크아웃을 했다. 오차드로드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번 더 구경하고 집으로 갈까 하다가 그냥 집으로 왔다. 최근에 싱가포르에서 코로나19 환자가 상당히 늘어나고 있어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니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창문을 모두 열고 환기를 시켰다. 단 하루 집을 비웠을 뿐인데도 습도 때문에 꿉꿉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호텔 객실이 좋다 해도 우리 집만큼 편하지는 않았다.
집 놔두고 굳이 비싼 호텔 요금을 지불하며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낼 필요는 없었지만, 가족끼리 보낸 그 하룻밤은 비싼 돈을 지불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에서 가족 모두가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가족애를 더욱 느꼈다. 다 함께 했지만 또 각자 원하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1박 2일 동안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양질의 시간을 보냈다. 생기 넘치는 초록빛 식물로 장식된 호텔에서 다 함께 즐긴 힐링의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없을 만큼 가치 있었다. 2023년 크리스마스는 우리 가족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우리에게 기쁨과 감사함을 선물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