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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Jan 09. 2024

나 홀로 집에 남았다

가족들이 하나둘씩 해외로 떠났다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텅 빈 집 안에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가 가득 울려 퍼진다. 오늘밤은 왠지 좀 쓸쓸하다. 가족들은 학업, 여행, 출장 등의 이유로 제 각각 다른 나라에서 지내고 있다. 나 홀로 싱가포르에 덩그러니 남아 있으니 외로운 마음이 든다. 심심할 겨를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쁜 일상을 보내지만 밤이 되면 이상하게 마음이 촉촉해진다. 아이들 방을 찬찬히 둘러본다. 아이들이 쓰던 물건을 만지작거리다 공연히 흩트려지지도 않은 이불을 빼내 다시 가지런히 정리한다.




결혼하기 전에 10년 동안 혼자 살았다. 혼밥이나 혼술과 같은 문화가 일반적이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식당에 혼자 들어가서 밥을 먹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다. 가끔은 일행이 없어서 테이블을 내 주기 어렵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혼자 나가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영화도 봤다. 직장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즐겼지만 나 혼자만의 시간도 즐겼다. 타인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밑바탕에는 나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이 있었다. 내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내 시간이 절대적으로 줄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아이들을 낳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 없이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늘 바빴다. 큰아이가 9개월이었을 때 작은아이가 생겨서 무척이나 힘에 겨웠다. 아이들을 다 키워 놓고 혼자 자유롭게 다닐 상상을 하며 이 시간을 충실히 보내자고 생각했다. 큰아이가 백일쯤 되었을 때 남편이 나에게 큰 선물을 해 주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의미 있는 선물이었다. 혼자 뉴욕에 가서 일주일을 보내라며 나를 고속버스에 태워 보냈다. 브로드웨이에서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을 실컷 보고 돌아오니 삶의 활력이 생겼다. 아기를 돌보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건 그렇게 큰 의미가 있었다.


한국의 여느 엄마들처럼 나도 아이들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 무척이나 바쁘게 살았다. 엄마, 아내, 선생, 학생의 역할을 동시에 하며 살다 보니 늘 시간에 쫓겼다. 가끔씩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겨 놓고 한나절 시내에 나가서 쇼핑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오곤 했다. 몇 해 전, 가족들이 한국으로 여행을 가고 나 홀로 싱가포르에 남아 2주일 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아이들이 먹을 밥을 해 놓고 일하러 가느라 바빴는데 아이들이 없는 2주 동안은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도 시간이 남았다. 내가 먹고 싶은 시간에,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해서 먹을 수 있으니 정말 편리했다. 빨래와 청소하는 것도 간단했다. 여유 시간에는 라디오를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었다. 20여 년 만에 진짜 싱글로 돌아간 것 같았다. 시간이 가는 게 아까웠다.




얼마 전 가족들이 하나둘 집을 떠났다. 예전과 달리 혼자 있는 시간 하나도 달콤하지 않다. 왜 이렇게 허전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갱년기라 그럴까. 혹시 빈둥지증후군을 겪고 있을까 싶어서 인터넷에서 찾아보았지만 내게 해당되는 증상이 없었다. 삶의 중심이 아이들이 아니라 나에게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떠났다고 해서 내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한지, 왜 이렇게 쓸쓸한지 잘 모르겠다.


하루 종일 바쁘게 지내다 보면 금세 밤이 된다. 밤이 되면 적적하다. 적막한 집에 혼자 덩그렇게 남아 있는 것 같다. 남편은 내가 걱정되는지 예전에 비해 자주 영상통화를 걸어온다. 작가와 화가에게는 고독한 시간이 필요하다며 이 시간을 잘 활용해 보라고 했다. 남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글을 쓰며, 그림을 그리며, 시를 읽어가며 이 시간을 충만하게 채워 봐야겠다. 고요한 이 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애써 마음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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